[까칠 칼럼] 왜란 때 조총 동인 서인 안 가렸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 조정은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신들은 귀국해서 임금에게 보고했다.
정사인 황윤길은 “반드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반면 부사인 김성일은 “병화가 일어날 리 없다”고 보고하고 있었다.
침략의 원흉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서도 “눈에 광채가 있고, 담략이 남달라 보였다”는 보고와, “눈이 쥐새끼 같고, 생김새는 원숭이 같아서 두려울 것이 못된다”는 상반된 보고였다.
그러니 헷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조종이 헷갈렸으니 백성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유는 뻔했다. ‘당쟁’ 때문이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동인’이었다.
서인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동인은 절대로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맞섰다.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있는데도 국가보다는 정당의 이익이 중요했던 것이다.
결국 조선은 별다른 대비책도 세우지 못한 채 임진왜란을 맞아야 했다. 잘 알려진 ‘500년 전 과거사’다.
왜군이 무장하고 있는 조총에는 ‘눈’이 없었다. 조총은 도요토미를 좋게 평가하고, 일본이 쳐들어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 동인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다. 동인도, 서인도 가리지 않았다.
동인, 서인에 속하지 않은 양민이라고 다를 것 없었다. ‘유효사거리’에서 보면 모두가 하얀 옷을 입은 조선 사람이었다. 자기들이 써먹을 수 있는 기술자만 살려서 끌고 오라고 했을 뿐이다.
왜군은 도요토미의 지시로 조선 사람들의 코를 베어갔다. 코 역시 당파를 가리지 않았다. 동인의 코라고 무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아기를 갓 낳은 산모의 코도 잘랐다. 옆에 누워 있던 갓난아이의 코마저 베어갔다.
그렇게 베어간 코를 한꺼번에 묻었다. 그리고 ‘코 무덤’이 아닌 ‘귀 무덤’이라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6·25전쟁’ 때에도 대포에는 눈이라는 게 없었다. 건너편 산등성이에서 날아오는 대포알은 눈이 어두웠다.
대포는 좌익과 우익을 가리지 않았다. 좌익이라고 사정을 두는 일은 없었다. 좌익도, 우익도 한꺼번에 쓰러져야 했다.
지금은 대포 정도가 아니다. 미사일은 아득한 곳에서도 날릴 수 있다. 미사일 역시 눈이 없다. 눈이 달렸다고 해도 봐줄 틈도 없다. ‘워 게임’하듯 단추만 누르면 끝장이다. 곧바로 ‘불바다’다.
지금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의 무기도 눈 따위를 생략하고 있다. 있더라도 아예 감고 있다. 대량살상무기라는 ‘진공폭탄’을 썼다는 보도까지 나오고 있다.
그 바람에 민간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사망하고 있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있다. 세계가 그런 러시아를 비난하고 있지만 되레 ‘핵 위협’이다.
그래서 안보는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선거판은 안보를 놓고도 다른 목소리다. ‘초보 대통령’, ‘북한 미사일’, ‘사드 배치’, ‘일본 자위대’ 등을 따지며 ‘표 계산’이다.
목소리가 다르면 해법도 엇갈릴 수밖에 없을 노릇이다. 대비책 없이 국난을 맞는 것이다. 500년 전 왜란 때에도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