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현 칼럼] SPC 파리바게뜨 불매운동을 불매한다

2022-10-26     이정현 객원위원

[뉴스클레임] 다양한 상품들과 신생 브랜드들의 끊임없는 출현. 이른바 소비지상주의의 시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수많은 상품만큼이나 ‘사면 안 되는 상품’ 또한 셀 수 없이 많아졌다. 그렇다. ‘불매운동’의 이야기다. 

불매운동은 비교적 소극적인 실천 방법이긴 해도 ‘티끌 모아 태산’처럼 많은 시민들의 참여를 모아 금전적인 타격을 주는 방식으로 대상에 대한 보이콧(Boycott)의 의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민운동이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 등의 온라인 네트워크와 함께하게 되면서 더 큰 파급력을 갖췄고, 이제는 이슈가 생길 때마다 뒤따르는 보편적인 현상처럼 됐다.

최근에도 새로운 불매운동이 시작됐다. ‘파리바게트’나 ‘파리크라상’으로 잘 알려진 SPC그룹에 대한 불매운동이다. 해당 그룹의 계열사인 SPL의 경기도 평택시 소재 제빵공장에서 사망 사고 이슈가 발생했기 때문인데, 사고만으로도 안타깝고 끔찍했지만 이에 대한 SPC 그룹의 대응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워서 더욱 논란이 커졌다. SPC 그룹 회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대국민 사과를 했지만, 이미 시기를 놓친 데다 다른 계열사에서 또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하면서 불매운동은 더욱 확산될 기세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감히 ‘SPC 불매운동을 불매한다’고 주장해본다.

단지 SPC 불매운동에 대한 것뿐만이 아니다. 여러 불매운동을 비롯해 온라인에 기반한 다양한 시민운동을 오랫동안 지켜보며 느낀 소회를 전한다.

SPC 허영인 회장과 경영진들이 지난 21일 서울 양재동 SPC 본사에서 SPL 안전사고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사진=SPC그룹

■언사에 맞지 않는 소극적 실천=요즘 불매운동에 참여한다는 선언(?)들을 보다 보면 일련의 패턴이 보인다.

먼저 사회 이슈에 대해 문제의 심각성을 역설(力說)하면서 거창한 대의명분을 걸어놓는다. 각종 수사나 현학적인 문구들도 빠짐없이 등장하는데, 이런 언어적 조미료들이 한껏 돋우는 분위기 속에서 행동의 당위성과 정의로움을 외치는 모습은 자못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결의에 찬 이야기를 늘어놓지만 결국 실천 내용은 불매운동. 비교적 소극적인 실천 방법인 불매운동을 말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뜨겁게 말하는 모습은 어색하기만 하다. 해당 이슈의 심각성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나 불매운동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진정성마저 느낄 수 없으니, 이를 보고 위선적이란 평가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필자의 주변에도 삼성 반도체 노동자 사망사건 등의 이슈에 비분강개하며 ‘삼성 불매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이 있었다. ‘삼성불매’를 비롯한 여러 슬로건이 덕지덕지 붙여있는 SNS 프로필 사진은 자신들의 마음을 나타내는 훈장과도 같았다.  한편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기기가 새로이 출시되면 마치 얼리어답터라도 된 냥 자랑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는데, 그들이 구매한 제품들은 비록 브랜드는 삼성이 아니었다고 하나, 삼성이 제조한 반도체가 핵심 부품으로 들어가 있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쓴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비극을 먹고 사는 공생관계=심지어 ‘‘깨어있고 선하고 정의로운 멋진 나’를 연출하기에 불매운동보다 더 효과적인 도구가 또 있을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많은 듯하다. 누가 결제내역을 확인하는 것도 아니고, 발언만으론 책임질 일도 없고 뒷감당에 대한 고민도 필요 없으니, 그들에게 있어선 어떻게든 멋있게 선언하기만 하면 되는 셈.

그런 자아도취가 각자 개인의 몸부림 정도로 끝나면 좋으련만, 여기에 가담하는 사람들이 생기면 일련의 사회 현상이 돼버린다. 이른바 ‘물고 빠는 공생관계’. 이들은 기존의 참여 선언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응원의 댓글을 쓰는 방식으로 ‘정의로운 멋쟁이를 따르는 나 또한 정의로운 멋쟁이~’의 기분을 즐긴다. ‘틱톡(Tiktok) 챌린지’의 사회 이슈 버전이 이런 모습이지 싶다.

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암만 거창하게 불매운동을 이야기하지만, 책임이 수반되는 행동(예를 들면 불매운동의 확산을 위한 조직을 결성하기)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란 극히 희박하다. 

막상 깃발이 세워진다 한들, 좀 전까지 ‘좋아요’를 누르며 지지와 응원의 댓글을 작성하던 그 많은 사람은 어느새 다들 자취를 감추거나 다른 이야기를 한다. 어느 쪽이건 입은 뜨겁지만 진정성이 느껴지는 행동은 없고, 혹시 모를 책임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백도어는 활짝 열어놓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 불매운동은 결과적으로 ‘좋아요 수’와 ‘불신’만을 남기게 된다. 그들이 주고받는 내용과는 정반대로 문제 해결은 요원해지고, 덕분에 이슈는 저렴하게 소비되어간다. 누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고 참여자 스스로와 그 주변이 직접 만들어낸 결과다.

이렇게 하나 마나 한 선언이라니, 마치 작심삼일의 다이어트나 금연, 금주 선언을 보는 것 같다. 너무나도 저렴하고 공허한 정의감이다.

■껍데기는 가라=지금까지 언급한 작태들에 대해 온라인의 생리(生理)요 현대 사회의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착하고 정의로운 나’로 치장하기 위해, 사람들의 눈물과 사회의 비극마저 패션 액세서리처럼 소비하는 속물들이 늘어만 가는 모습은,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받아들이기 어렵다. 

한편 이와 비슷한 사례들을 근거로,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모든 불매운동을 싸잡아 폄하하는 시니컬한 의견들도 보인다. 허나 이 또한 받아들이기 어렵다. 분명 불매운동에는 여러 한계점이 존재하고 그 전개 과정에도 많은 노이즈가 발생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의사 표현 수단으로서 불매운동이 그 역할을 한다는 지점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것마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시민들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자는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

요컨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함’이다. 먼저 어떠한 마음이든 간에, 걸맞은 그릇에 담겨야 비로소 의미 있는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고, 이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 진실함인 것이다. 나 자신에게 진실해야 하고, 타인과 사회에도 진실해야 한다.

책임을 지는 행동도 골치 아픈 것도 싫다면 그것에 맞게 솔직하게 한풀 힘을 빼고 말하면 된다. 반대로 문제의 심각성을 깊게 느끼고 있다면 그것에 맞게 뜨거운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SPC 불매운동을 불매한다는 말의 의미다. 

이리하여 더욱 많은 이들이 진실해질수록 유가족들의 눈물을 닦아드리는 데에도, 우리 사회의 어둠을 걷어내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해당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