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률의 문학칼럼] 광기의 오락? 화려한 휴가?

2023-09-26     박상률 작가
사진=박상률 작가

[뉴스클레임]

독일의 베를린은 역사와 문화가 곳곳에 가득 차 있다.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장남주 지음/푸른역사 펴냄)’이라는 책의 지은이는 베를린을 산책하듯이 하면서 만난 나치의 흔적을 꼼꼼히 새긴다. 글과 사진으로.

지은이의 말마따나 베를린을 산책한다는 것은 과거와 미래가 조응하는 어디쯤에서 현재를 걷는 일이다. 시인 브레히트는 말한다. ‘당한 고통에 대한 인류의 기억은 놀랍도록 짧습니다. 다가올 고통에 대한 상상력은 더더욱 희박합니다. 수천 번 넘게 외쳤어도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다시 외칩시다! 경고를 갱신합시다. 이 경고가 이미 우리 입 속에 재가 됐다 하더라도...’

브레히트의 지적은 정확하다. 우리는 시방 2023년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당한 고통에 대해 놀랍도록 짧은 기억을 실감하고 있고, 다가올 고통에 대해서는 더욱 빈약한 상상을 하고 있다.
나치가 책을 불사른 일을 되새기면서 지은이는 이렇게 쓴다. ‘이제 나치의 이념과 다른 생각은 금지 되고, 활발한 토론이 벌어지던 자리엔 블랙리스트가 나붙었다.’ 

20세기 독일의 최고 풍자작가로 인정받는 투홀스키. 시대 비판가이자 군국주의에 반대한 그는 ‘무솔리니 같은 자나 이등병 히틀러는 자신들의 힘보다 무기력한 반대세력 때문에 살고 있는 것’이라고 일갈한다. 우리도 지금 그렇지 아니한가? 

투홀스키가 살던 집의 추념 동판은 이렇게 시작한다. ‘언어는 무기다. 날카롭게 벼리고 있어라.’ 용산으로 상징되는 국민의 대표자와 그를 둘러싼 무리들이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러도 야당 세력은 한없이 무기력하기만 하다. 무기인 언어를 잘 벼리기는커녕!

다시 브레히트의 말. ‘범죄가 계속되면 결국 보이지 않게 된다.’ 지금 우리 현실이 그렇다. 자기네들 맘에 안 드는 것은 죄다 ‘가짜뉴스’라 하며 박멸을 외친다. 진짜 가짜뉴스는 자신들이 생산한다. 많은 사람들이 체념한다. 그들의 전략도 통한다. 그들의 가짜뉴스에 가려져 진짜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전략은 결국 그들 자신을 옭아맬 것이다.

나치 패거리와 같은 수준으로 놀았던 일본제국의 담당자들. 그들은 오로지 국가주의와 군국주의만을 내세웠다. 개인의 삶은 없었다. 조선땅에서 산 조선인의 삶도 신산하기 짝이 없었지만 일본에 있던 조선인의 삶은 풍전등화였다. 그래서 김응교 시인은 ‘백년 동안의 증언(김응교 지음/책읽는고양이 펴냄)’이라는 책을 썼으리라. 읽어갈수록 김응교 시인만이 쓸 수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평소에 글은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게 아니라 쓸 수 있는 것만을 쓴다’ 고 생각한다.

‘백년 동안의 증언’은 비극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일본의 간토대지진을 통해 보여준다. 지진이 나자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다닌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탄다’ 며 조선인의 폭동설을 주창하며 집단 학살을 시작한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관지였던 ‘독립신문’은 조선인 사망자를 ‘6661’명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일본 관헌들의 모든 행위가 어이없었지만, 쓰보이 시게지의 시 ‘15엔 50전’을 읽을 때는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은이 김응교 시인의 번역으로 수록 된 시 가운데 특히 더 전율했던 부분은 ‘15엔 50전’의 간토식 발음(쥬우고엔 고쥬센) 여부로 조선인과 간토 지역 발음을 못하는 일본인도 조선인으로 여겨 죽인 대목.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 뒤 고향집에 가느라 시외버스를 탔을 때 차가 들르는 지역의 차부마다 차에 오른 검문 경찰이 내 앞에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며 어떻게든 끌어내리려 하던 기억 때문에 더욱 치가 떨렸다.

‘쥬우고엔 고쥬센’을 ‘츄우코엔 코츄센’으로 발음하면 죽임을 당해야 했단다. 지은이는 이를 일러 ‘집단적 오락’ 내지는 ‘광기의 오락’이었다고 쓴다. 오락? 적확한 말이다. 1980년 광주의 5.18 때 공수부대의 작전 명이 ‘화려한 휴가’였던 것과 겹쳐진다. 광기에 빠진 인간은 사람을 죽이는 일도 ‘오락’이고, ‘휴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