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기 칼럼] 게을러야 좋을 때
[뉴스클레임] 어떤 손님이 이규보(李奎報‧1168∼1241)를 찾아왔다. 이규보는 그 손님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나는 게을러서 걱정입니다. 집에서 풀도 베지 않고, 책에 좀이 생겨도 펴보지 않고, 머리가 헝클어져도 빗지 않습니다. 병에 걸려도 치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치료할 방법이 없을까요.”
손님이 열흘 후 다시 이규보를 찾아와서 말했다.
“나에게 하얀 밥알이 둥둥 뜨는 좋은 술이 있습니다. 향기가 가득하고 술기운이 가득한 술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아이는 소리를 잘하고 비파도 잘 탑니다. 함께 가서 마십시다.”
이규보는 손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서 허리띠를 매고, 신발을 신었다. 그런데 손님이 갑자기 게으름을 피우며 우물쭈물했다.
손님은 의아해하는 이규보에게 다시 말했다.
“게으르던 당신이 서두르는 것을 보니, 게으름증이 나은 것 같습니다. 색은 성품을 해롭게 하는 도끼이며, 술은 창자를 상하게 하는 약입니다. 지금 당신의 태도는 본심을 훼손시키고, 몸을 망칠 것 같습니다.”
손님은 그러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나는 그런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에게 게으름증이 옮을 것 같습니다.”
이규보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손님에게 사과했다.
“앞으로는 즐기려는 욕심을 옮겨서 인의(仁義)에 힘쓰겠습니다.”
고려 때 선비 이규보가 쓴 ‘용풍(慵諷)’이라는 글이다.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은 게으름을 피우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은 서두르는 것을 꼬집은 글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런 현상이 넘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국민의힘 윤두현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심의한 디지털 성범죄 정보가 자그마치 5만5287건에 이르고 있었다. 이 가운데 5만4553건의 접속을 차단하고 있었다.
또 전봉민 국민의힘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불법촬영으로 6533명이나 검거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10대와 20대가 3269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2021년의 5792명보다 11% 늘었다고 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노동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올해 9월까지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신고가 4374건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희롱 신고는 ▲2018년 749건 ▲2019년 849건 ▲2020년 797건 ▲2021년 770건 ▲2022년 694건 ▲2023년 1~9월 515건 등이었다.
서영석 민주당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에는 작년 마약중독 환자가 721명, 도박중독 환자는 2312명이나 된다고 했다. 20대 마약중독 환자의 경우 2018년보다 170% 증가한 162명, 도박중독 환자는 104.3% 늘어난 846명이었다. 10대의 경우도 최근 5년 동안 마약중독 62.5%, 도박중독은 56.9%나 늘었다고 했다.
보이스피싱도 엄청났다. 금융감독원이 황운하 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작년까지 보이스피싱 피해가 무려 1조1722억 원에 달했다. 연도별로는 ▲2018년 2927억 원 ▲2019년 4859억 원 ▲2020년 1745억 원 ▲2021년 1080억 원 ▲2022년 1111억 원 등이었다.
범죄를 단속해야 할 경찰관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는 경우도 매년 수십 명이다.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공무원 음주운전 적발 건수는 ▲2018년 91명 ▲2019년 70명 ▲2020년 67명 ▲2021년 77명 ▲2022년 55명 ▲올 들어 9월까지 6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규보처럼 술에만 부지런한 모양이었다.
정치판도 빠질 수 없다. 국회는 올해도 대기업 총수를 무더기로 국정감사에 호출할 것이라는 보도다. 반면, 처리해야 할 민생법안은 무더기로 밀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조하는 게 민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