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기 칼럼] 게을러야 좋을 때

2023-10-06     문주영 편집위원
픽사베이

 

[뉴스클레임]  어떤 손님이 이규보(李奎報11681241)를 찾아왔다. 이규보는 그 손님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나는 게을러서 걱정입니다. 집에서 풀도 베지 않고, 책에 좀이 생겨도 펴보지 않고, 머리가 헝클어져도 빗지 않습니다. 병에 걸려도 치료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치료할 방법이 없을까요.”

손님이 열흘 후 다시 이규보를 찾아와서 말했다.

나에게 하얀 밥알이 둥둥 뜨는 좋은 술이 있습니다. 향기가 가득하고 술기운이 가득한 술입니다. 우리 집에 있는 아이는 소리를 잘하고 비파도 잘 탑니다. 함께 가서 마십시다.”

이규보는 손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둘러서 허리띠를 매고, 신발을 신었다. 그런데 손님이 갑자기 게으름을 피우며 우물쭈물했다.

손님은 의아해하는 이규보에게 다시 말했다.

게으르던 당신이 서두르는 것을 보니, 게으름증이 나은 것 같습니다. 색은 성품을 해롭게 하는 도끼이며, 술은 창자를 상하게 하는 약입니다. 지금 당신의 태도는 본심을 훼손시키고, 몸을 망칠 것 같습니다.”

손님은 그러면서 한마디를 보탰다.

나는 그런 것을 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에게 게으름증이 옮을 것 같습니다.”

이규보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히며 손님에게 사과했다.

앞으로는 즐기려는 욕심을 옮겨서 인의(仁義)에 힘쓰겠습니다.”

고려 때 선비 이규보가 쓴 용풍(慵諷)’이라는 글이다. 부지런히 해야 할 일은 게으름을 피우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은 서두르는 것을 꼬집은 글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그런 현상이 넘치고 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국민의힘 윤두현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심의한 디지털 성범죄 정보가 자그마치 55287건에 이르고 있었다. 이 가운데 54553건의 접속을 차단하고 있었다.

또 전봉민 국민의힘 의원실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불법촬영으로 6533명이나 검거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10대와 20대가 3269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2021년의 5792명보다 11% 늘었다고 했다.

이수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용노동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올해 9월까지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 신고가 4374건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희롱 신고는 2018749201984920207972021770202269420231~9515건 등이었다.

서영석 민주당 의원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받은 자료에는 작년 마약중독 환자가 721, 도박중독 환자는 2312명이나 된다고 했다. 20대 마약중독 환자의 경우 2018년보다 170% 증가한 162, 도박중독 환자는 104.3% 늘어난 846명이었다. 10대의 경우도 최근 5년 동안 마약중독 62.5%, 도박중독은 56.9%나 늘었다고 했다.

보이스피싱도 엄청났다. 금융감독원이 황운하 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2018년부터 작년까지 보이스피싱 피해가 무려 11722억 원에 달했다. 연도별로는 20182927억 원 20194859억 원 20201745억 원 20211080억 원 20221111억 원 등이었다.

범죄를 단속해야 할 경찰관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적발되는 경우도 매년 수십 명이다. 국민의힘 정우택 의원이 경찰청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공무원 음주운전 적발 건수는 201891201970202067202177202255올 들어 9월까지 6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규보처럼 술에만 부지런한 모양이었다.

정치판도 빠질 수 없다. 국회는 올해도 대기업 총수를 무더기로 국정감사에 호출할 것이라는 보도다. 반면, 처리해야 할 민생법안은 무더기로 밀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강조하는 게 민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