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에 서서] 하류 인생의 잔혹사
두렵기 때문에 미루는 것이다
[뉴스클레임]
오늘도 나는 또 같은 꿈을 꾸었다. 밤새 뜬눈으로 버티다가 새벽녘 잠깐 잠이 들라치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꿈이다.
흥건한 피가 목조 건물 바닥을 적신다. 한 발짝 한 발짝 옮기는 걸음이 만만치 않다. 발을 디딜 때마다 끈끈한 피가 발목을 휘감는다.
피비린내 나는 건물을 가까스로 벗어나자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닷가 언덕 위, 바로 눈앞에는 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다. 선명한 붉은 피가 질질 흐르는 칼을 손에 쥔 채 석양의 바다를 멍하니 바라보는 나의 뒷모습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말이 적확(的確)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 무엇을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새로움은 이곳이 아닌 저 너머에서 온다. 즉 나는 저 너머를 넘볼 용기를 잃었다는 말이다.
용기를 잃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의식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잠재의식에도 두려움이 스며들게 된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두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 잠재된 버릇이 발동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백해무익한 것은 미루는 것 때문이다. 두려움은 미룸을 합리화한다. 변명으로 일관하는 미룸은 변환을 저해시키는 동인(動因)이다.
쇳가루가 자석에 달라붙듯이, 두려움은 또 다른 두려움을 불러모은다. 두려움은 두려움만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다. 불안과 부정 방향 상실 등 정신적 번뇌로 나를 혼란으로 밀어붙이고, 일에 관한 판단과 결정, 그리고 행동을 지연시킨다. 두려움은 신체를 파괴하고 정신을 질식시키고, 영혼에 수의를 입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삶은 하류 인생이다. 특히 용기에 관해서는 특출나게 못난 존재이다. 인생 전반에 걸쳐 스스로 용기를 내 본 적이 없다. 용기를 냈다 한들 상황에 떠밀려서 냈을 뿐이다.
나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난 일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다. 반복이 하류 인생을 특징짓는 용어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하류 인생의 쳇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준 이가 나타났다. 그의 결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태열 대표를 처음 만난 곳은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이다.
당시 이 대표는 타슈켄트에서 한 달 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동남아 한 달 살기는 흔하지만, 중앙아시아의 타슈켄트에서 한 달 살기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타슈켄트에 온 것에는 무슨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이 대표는 말을 아꼈다.
“여기서 일 할 만한 것이 있는지 알아보고 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대표는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다. 잘 나가는 조선소를 직원에게 양도하는 과정에 있었다. 조선소를 넘기고 난 후의 할 일을 찾아서 타슈켄트로 넘어온 것이라고 했다.
기업양수도 문제는 하등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현물 거래, 즉 대가 없이 기업체를 넘기는 것이었다. 적자기업을 넘기는 것이 아니다. 현재 수익이 짱짱한 업체, 앞으로도 수년 동안 일거리 걱정이 전혀 없는 조선소를 무일푼으로 양도를 한다는 것은 범상치 않은 일이었다.
하류 인생답게 나는 어떤 이면 계약이 있을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했다. 물질적인 거래 말이다. 그러나 이 대표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냥 넘기는 것입니다.”
특별한 설명도 없었다. 다만 조각난 그의 말을 맞춰보면 대강의 그림이 그려졌다. 수익성 높은 조선소라는 것, 대기업의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조선소 하도급 업무에 이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 수십 명의 직원 중 믿을만한 직원에게 조선소를 무일푼으로 양도한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것 등등의 얘기였다.
이 대표가 던진 메시는 단순하지만 강력했다. 그것은 단절이었다. 단절은 삶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가능한 행동이다. 순간순간 깨어서 반응하면서 전체적으로 삶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류 인생이 ‘변화 어쩌고’ 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이 대표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변환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데 필요한 윤활유 같은 역할에 만족하는 변화가 아니라 삶의 DNA를 확 바꾸어 버리는 변환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 변환은 하류 인생이 범접할 수 없는 성숙한 삶의 결과이다. 그것은 급진적으로 의식을 바꾼다.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는 연금술 자체이다.
나는 연금술 근처도 가보지 못했다. 연금술을 꿈꾸면서도 나는 피상적인 삶을 추구해왔다. 겉모습을 바꾼다고 해서 내 삶이 황금색으로 변할 리 만무하다. 이대로라면 나는 주변부의 삶만 살다가 생을 마칠 것이다. 중심은 건드리지도 못한 채….
주변부의 삶은 아주 어둡고, 깊은 잠에 빠져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깊고도 어두운 잠에 빠져있으니 삶이 거칠고 힘들 수밖에 없다.
최근에 나는 피곤이 극에 달했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침대에 그대로 쓰러져버렸다. 메고 온 가방은 구석에서 나뒹굴었고, 벗어놓은 옷가지는 수세미 쑤셔박듯이 뒤 헝클어져 있었다. 나는 그런 너저분한 숙소를 정리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저 아픔이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온몸에 불에 댄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일단은 고통에서 벗어나 숨을 쉬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숨을 쉬고 싶다, 한 번만이라도 안도의 숨을 길에 내쉬고 싶을 따름이다.
이 대표를 다시 만났다. 결국, 조선소를 넘겼다고 한다. 아쉬울 법도 한데, 뭔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대표의 표정에서 나는 강력한 삶의 변환을 읽어내려간다,
삶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은 거창한 계기를 통해 찾아오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대화에서, 우연히 지하철에서 넘겨 읽은 책의 한 구절에서,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의 한마디에서, 길을 걷다가 만나는 아이의 해맑은 웃음 등 사소한 것들에서 영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 영감은 하늘의 선물이자, 신이 내려주는 고귀한 은총일 수 있다.
세상에는 영혼이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오직 안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용기를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미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자만이 영혼을 거머쥘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영혼은 미미하다. 생명력을 간신히 유지할 정도의 영혼이다.
다시 여정을 꾸밀 것이다. 틀에 박힌 삶을 벗어나 미지의 세계 속으로 모험을 떠날 것이다.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당장 떠나야 할 것이다. 경계선을 따라 방랑하는 길이 나 자신만의 길일 것이다.
이제 다시 꿈으로 돌아가자. 신은 직접 얘기할 수는 없다. 나의 입이든, 너의 눈이든 피조물을 통해 신의 의지를 전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피 묻은 칼을 손에 쥔 채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는 사내는 누구이며, 반복되는 꿈은 무슨 의미일까?
꿈속에서 사내가 읊조리는 구절이 갑자기 떠오른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마태복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