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여행] 봄 물이 들어 초록빛이 강렬했던 후포의 푸른 바다

이천리 해파랑길 해파랑길24코스(1)

2024-09-07     오근식 객원위원
울진 후포항은 포항 구룡포, 영덕 강구안과 함께 우리나라의 3대 대게 집산지다. 대게뿐 아니라 관광지로서도 손색이 없다. 등기산은 해발 53.9미터에 불과해 누구든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는데 이곳에서의 후포 풍경은 해발 수천 미터의 어느 높은 곳의 풍경보다 못하지 않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뉴스클레임]

해파랑길24코스는 후포항에서 기성면 공용 정류장까지 18.4km의 길이다. 바닷가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걸으면서 울진 남대천 하구의 평해습지, 월송정, 구산해수욕장 등을 거쳐 마지막 내륙의 길을 약 2.5km 걷는다. 걷기에 어려움이 전혀 없는 길이다.

숙소가 있는 평해버스정류장에서 후포항까지는 7km가 채 되지 않고, 이날 목적지였던 월송정에서도 숙소까지는 4km 정도여서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편했지만, 후포항까지 차를 가지고 갔다. 전날 놓고 온 휴대전화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식당이 문을 연 오전 10시에 전화를 받아 걷기 시작했다. 2월 마지막 날이었는데 하늘은 여전히 전날에 이어 화창했다. 찬 바람도 느껴지지 않으니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날이었다.

후포항 배후의 상가는 충분한 주차장을 갖추고 사람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대게 식당의 수와 다양성을 보면 영덕의 강구안이나 포항 구룡포와는 비교될 수준은 아니다. 수산물을 판매하는 재래시장도 초라한 수준이다. 그렇지만 후포항은 우리나라 최대의 대게 집산지이고 울진군에서 전략적으로 후포항을 관광지로 개발하고 있어 가 볼 만한 곳이다. 

등기산은 공원이다. 이곳의 기미년 3.1운동 순국열사를 추모하는 비석은 소박하지만 빼어나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해파랑길 안내도를 살펴보니 부산 오륙도에서 이곳 후포항까지 약 445km를 걸어왔다. 이곳에서 고성 통일전망대까지 남은 거리는 약 325km다. 어느새 절반 넘게 걸었다. 후포항에 정박해 있는 대형 크루즈 여객선을 얼핏 보고 길잡이 리본을 찾아 걸었다. 잠시 골목길을 걷고는 이내 후포항을 내려다보는 등기산으로 향한다.

사위와 장인 장모를 주인공으로 십여 년 동안 방송되었던 ‘백년손님’이라는 프로그램을 촬영했던 집을 지나 걸어 오르다 보니 드라마 촬영장이라는 팻말이 붙은 집이 보인다. 이젠 잊혀 가는 중이지만 이러한 방송 때문에 후포리가 전국에 널리 알려지긴 했다. 골목에 꽤 정성 들인 벽화가 보인다.

요즘엔 케이블카만큼이나 흔한 스카이워크 전망대다. 전망대 끝에서 바라보는 경치보다는 이 구조물을 포함한 경치가 더 아름다웠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등기산은 해발 53.9m의 낮은 산이어서 힘들지 않고 걸어 정상부에 가까이 올랐다. 후포항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후포항 남쪽 산 아래 고층 아파트를 짓고 있다. 다 지어지면 아마 그 뒤의 산보다 높은 건물이 될 듯했다. 지방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데 저 아파트가 꼭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잠시 바라보고 서 있는데 찻집 주인 남자가 나와 한마디 거든다.

“외지 사람들이 저 아파트를 보고는 ‘후포리에 저렇게 큰 아파트가 필요하냐’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후포리 사람들도 편하게 아파트에 살면 안 됩니까?’라고 반문합니다.”

그에게 내 생각을 들킨 듯했다.

바다 풍경이 일품이어서 어느 곳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어도 좋은 조형물들이 가득하다. 눈길을 끄는 이 모형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 섬에 있었던 세계최초의 등대다. 오늘날 40층 건물의 높이와 비슷한 크기의 이 등대에서 밝히는 빛은 반사경을 타고 50km 밖까지 전해졌다고 하며, 후대에 지진으로 무너져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이제는 등기산 등대공원 올라서니 먼저 남호정 (南湖亭)이 반긴다. 정자에서 잠시 숨을 돌리며 바라보니 꽤 많은 조형물이 자리를 잡았다. 하나같이 요즈음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추어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모양새다. 배경으로 멋진 바다가 있으니 어떻게 찍더라도 멋진 작품이 된다. 어느 것 하나 지나치기 아쉬워 사진을 찍으며 놀다 보니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났다. 사실 이 등기산은 흰 깃발과 봉화를 이용해 이 부근을 지나는 배의 지표 역할을 하던 곳이다. 1968년 이곳에 후포등대가 설치되어 깃발과 봉화는 사라졌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설치한 많은 조형물 중의 하나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내려오기 전 바라본 등기산 전경이다. 꽃피는 봄의 풍경이 궁금했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등기산을 내려오는데 정자가 하나 더 보인다. 망사정이다. 처마 아래 고려말의 학자인 근재(謹齋) 안축 (安軸)의 한시와 번역문 현판이 보인다. 정자에 걸려 있는 한시는 사람들 대부분이 읽고 그 뜻을 짐작하기 어려운데 그나마 번역문까지 함께 있으니 한 번 더 눈길이 간다. 이 정자에서 보는 바다 전망이 일품이다. 시를 한 수 더 읽었다. 시인 신경림의 시를 새긴 시비가 거기 있었다.

등기산을 내려오는 길에 서 있는 이 망사정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은 단연 최고다. 고려시대 학자 근재 안축의 시 한수가 번역문과 함께 걸려 있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동해바다 후포에서 

친구가 원수보다 더 미워지는 날이 많다. 
티끌만한 잘못이 맷방석만하게 
동산만하게 커 보이는 때가 많다. 

그래서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남에게는 엄격해지고 
내게는 너그러워지나 보다. 
돌처럼 잘아지고 굳어지나 보다. 

멀리 동해바다를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널따란 바다처름 너그러워질 수는 없을까
깊고 짙푸른 바다처름 
감싸고 끌어안고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스스로는 억센 파도로 다스리면서 
제 몸은 맵고 모진 매로 채찍질하면서

바다는 푸르고 푸른데 곧 올 봄기운을 품고 있어서 따습게 보인다. 갈 길은 먼데 후포의 푸른 바다가 놓아주지 않는다.

3월을 하루 앞둔 후포의 푸른 바다에 봄 물이 들어 초록으로 변하고 있었다. 저 산모퉁이를 돌아 걸어야 하는 길이 제법 먼데 마음은 한가롭다. 바다가 이렇게 멋진데 가다가 멈추면 또 어떠랴.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글쓴이 오근식=1958년에 태어나 철도청 공무원, 인제대학교백병원 그리고 건국대학교병원에서 일했다. 2019년 2월 정년퇴직하고, 제주 올레, 고창과 통영의 길과 섬을 걸었다. 이후 해파랑길 750km를 걷기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1,470km의 남파랑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