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후 칼럼] 옛 부도덕의 역설
[뉴스클레임]
휴전 대신 확전을 원하는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리더십이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이스라엘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등 이스라엘 주요 도시에서 가자지구 전쟁 발발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미국 CNN 방송에 따르면 적어도 70만 명이 시위에 나섰다. 예루살렘에서는 시위대가 총리실을 에워쌌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에 끌려갔던 이스라엘 인질 6명이 죽은 채 발견되면서 이스라엘 국민이 인질 석방을 위한 휴전을 촉구한 것이다.
이에 대해 네타냐후 총리는 오히려 강경전략을 선택했다. 정치적 입지를 고려, 확전을 원하고 있다. 개전 초기부터 이어온 전략을 수정하지 않고 고집하는 것이다. 이같은 확전 태세는 총리 개인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라는 분석이 연이어 외신을 타고 날라오고 있다. 어처구니없는 일개 개인의 욕망일 따름이다.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전쟁의 양상보다 이스라엘 국민의 시위이다. 좀처럼 단체행동을 하지 않는 이스라엘 국민이 거리에 나선 이유는 단 한 가지로 귀결된다. 그것은 ‘고통’이다. 협상할 수도 있는 전쟁을 고집스레 끌고 가는 단 한 사람 네타냐후 총리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이 심각한 고통을 호소하는 것이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에 세운 것은 ‘테니스코트 선언’에서 비롯됐다. 삼부회의 한 축인 평민들이 테니스코트에서 모여 한 법 제정을 목적으로 ‘국민의회 해산거부’를 서약한 사건이다.
테니스코트의 서약은 평민들의 세금 증액에 대한 불만이 근간이었다. 세금 인상 몫은 모두 평민층에서 부담해야 했다. 1789년 6월에 일어난 이 사건은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꼽힌다. 프랑스 혁명은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행복추구권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면 국민은 언제든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간을 거슬러 이스라엘 국민의 시위와 프랑스 국민의 시위 양상은 다르지만, 시위가 벌어진 원인은 똑같다. 시위의 원인은 국민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과 리더들은 국민의 고통을 철저히 무시한다는 것이다. 효율적인 리더십이 발휘됐더라면 국민이 받지 않았을 고통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고통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고통을 줄여주는 것, 그것이 바로 리더십의 본질이다. 그렇게 간단하다고? 그렇다. 간단하다, 간단하기 때문에 오히려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국내로 돌아보자. ‘리더란 추종자가 있는 사람이다’라는 피터 드러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윤석열 대통령의 리더십은 치명적이다. 추석 직전 13일 한국갤럽이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직무에 대한 긍정평가가 20%로 취임 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의료대란을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다. 사회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고 있다. 그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하나로 이어진다. 국민의 신음이 거세지고 있다는 것이고, 이에 따른 리더십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리더십을 거창하게 포장해서는 안 될 일이다. 포장하면 할수록 리더십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보여주기식 포장을 다 버리고 속 알맹이인 본질만을 갖고 리더십을 다뤄야 할 것이다.
‘공정과 상식’, 이것은 윤석열 정부의 리더십을 가늠하는 중요한 무게 추이다. 그런데 무게 추가 심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국민 누구나 무게 추가 심하게 기울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 대통령을 비롯한 대통령실만 모를 뿐이다. 그들은 알면서도 공정하다고 우기고 있다는 편이 정확한 진단일지 모르겠다.
국민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윤석열 정부가 공정과 상식을 실현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패거리 이익을 중시한다는 것으로 믿고 있다. 리더십에 획기적인 변화가 없다면 국민의 이런 고통스러운 믿음은 더욱더 깊어질 것이다.
리더십의 획기적인 변화에 자리할 것은 윤리이다. 윤리는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윤리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쉬울 때도 있지만 매우 힘든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윤리는 자신의 이익을 뛰어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권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이 바로 윤리이다.
따라서 윤리적 리더십은 더 넓은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에 따른 판단과 행동이다. 윤리적 리더십으로의 변환은 어떠한 정책보다 획기적이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정상으로 간주 되는 사회에서 윤리적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급진적인 변화를 이끌 것이다.
여기서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시지윅의 ‘옛 부도덕의 역설’은 윤리적 리더십으로의 변환에 중요한 힌트가 될 수 있다.
‘내가 사회적 의무를 행하는 것이 나에게는 이롭지 않으나 남에게는 이롭다’라는 ‘옛 부도덕의 역설’ 말이다.
윤리적인 리더십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라는 물음이 아니고, ‘어떻게 나라를 이끌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윤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행동하는 토대라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