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여행] 관동팔경 중 가장 남쪽에 자리한 월송정

이천리 해파랑길 해파랑길24코스(3)

2024-09-21     오근식 객원위원
아직 코로나19가 물러가지 않은 때여서 인적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거일리 바다를 소나무 한 그루가 홀로 지키고 있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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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리는 1970년대 정부 주도의 새마을운동이 추진되면서 중앙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이미 1960년대 초에 이 마을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힘을 모아 후포항까지의 해안도로를 개설해 삶의 질을 개선함으로써 당시 새마을운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2년 이른 봄엔 당시 전국을 강타하고 아직 수그러들지 않고 있던 코로나19의 탓이었는지 어디를 보아도 인적은 없었다.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있었지만 문을 열고 있는 식당은 없었다. 준비해온 가벼운 먹을거리와 음료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은 보이지 않아도 바다는 여전히 파랗게 하늘을 가득 담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이 마을 사람들이 가꾸어 온 ‘미역짬’은 날다가 지친 갈매기들의 쉼터가 되고 있었다. 

혹시 찾아오는 이를 위해 벽화로 단장하고 있는 거일리 마을은 벽화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가졌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바닷가로 끝없이 이어지는 길의 풍경은 거의 변화가 없다. 끊어지지 않는 백사장은 좁고 그 끝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어김없이 사람들의 출입을 방해하고 마을의 집들은 이 바다를 바라보며 길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을엔 비어 있는 집들이 자주 보이고 그 뒤의 언덕 곳곳엔 독특한 모양의 숙박시설이 지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바위에 붙어 자라는 미역을 채취하기 위한 시설이지만 아직 미역 채취하기에는 이른 때여서 갈매기만 하릴 없이 날며 바다 풍경에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었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파란 하늘과 바다와 바위에 부딪치고 있는 파도에 움찔거리는 갈매기 바라보기가 싫증나기 시작할 때 쯤, 바다로 흘러드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만났다. 평해 남대천이다. 울진에는 남대천이 하나 더 있는데 울진군청 앞을 흘러내려와 왕피천 근처에서 바다로 들어가는 강도 남대천이다. 

바닷가 걷기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는지 다리를 건너자 바다가 사라졌다. 아직은 어린 태를 벗지 못한 곰솔이 울창한 방풍림 속에서 솔잎 스치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느리게 걸었다. 평해습지공원은 아직 봄을 기다리고 있어 눈길만 주었다. 길이 이끄는 대로 다시 바닷가로 나가니 넓은 모래밭이 북쪽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다.

평해남대천을 건너 걷다가 만난 방풍림의 소나무들은 아직 어린 태를 벗지 못했지만 함께 어울리고 기대며 멋진 숲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방풍림이 슬쩍 갈라지고 그 안쪽 언덕에 정자가 내다보고 있었다. 관동팔경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월송정이다. 외관으로 보아서는 그리 오래된 정자는 아니었다. 정자 마루에 올라서고 보니 월송정을 주제로 한 시문을 새긴 현판이 여럿 걸려 있다. 얼핏 月松亭(월송정)으로 생각했는데 越松亭(월송정)이었다.

단정한 해서체의 월송정기는 말미에 이산해(李山海)가 썼음을 밝혀 놓았다. 이산해(李山海) 고려 말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7세손이고,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이 그의 숙부다. 이산해의 둘째 딸이 ‘오성과 한음’ 이야기로 잘 알려진 한음 이덕형과 혼인했다. 

평해남대천이 바다와 만나는 곳에 형성된 습지는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어 걸으며 사구, 습지식물, 새 등을 관찰할 수 있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이산해는 선조 재위 중 정치적으로 송강 정철과 대립했다. 송강 정철이 속했던 서인 세력이 몰락하고 이산해가 속했던 동인이 집권했다. 이후 서인 세력 처리를 두고 동인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한양이 함락되며 이산해는 파직되어 월송정이 있는 이곳 평해로 유배되었다. 월송정기는 이 시절에 쓴 것으로 추측된다. 이산해라는 인물을 찾아보니 선조시대의 많은 인물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평해사구습지 생태공원을 지나 잠시 바닷가를 걸으면 관동팔경 중 가장 남쪽에 있는 월송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그리고 눈길이 멈춘 편액에는 정조가 ‘월송정’이라는 제목으로 쓴 시문이 멋진 서체로 새겨져 있었다. 글씨를 쓴 이는 우산 송하경 (友山 宋河璟) 선생이다. 성균관대학교 교수였고 1960년 대 초 성균관대학교 학생동아리인 성균서도회의 창립 회원이다. 24년 후에 내가 그 동아리에 들어가 처음 붓을 잡았으니 대 선배이고 스승이다. 내 글씨는 세상사에 치여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나, 적어도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난 그의 글씨를 알아볼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시문 한 글자 한 글자를 찾아 그 음과 뜻을 알아보고 문장의 뜻을 풀이하는 숙제가 남았다.

조선 전기 세종 시절 함경도 지역의 6진을 개척하고 국경을 두만강까지 확장하고, 세조 즉위 과정에서 희생된 절재 김종서 (節齋 金宗瑞)의 편액이 있으니 이를 빌미로 찾아 들어가면 세종-문종-단종-세조에 이르기까지의 사건과 인물을 공부할 수 있겠다. 

월송정에 오르면 창해무변(滄海无邊)의 동해바다와 마주한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편액을 살피느라 월송정에서 바라보는 바다 경치는 뒷전이었는데 문득 내다보니 수평선이 눈높이에 보인다. 양 편의 솔잎이 푸르고 가운데 흰 모래밭과 그 너머로 푸른 바다와 하늘이 켜켜이 쌓여 있다. 높은 곳에 우뚝 선 정자가 아님에도 이렇게 멋진 경치를 마련하고 있어 오래 전부터 많은 사람이 이곳을 찾아와 그 감흥을 남겼고 그 소문이 퍼지고 퍼져 정조에게까지 전해졌을 것이다.

바다 반대편에서 보는 월송정의 정면이다. 1979년 12월19일에 공사를 시작해 1980년 7월 29일 공사를 끝냈다.  월송정 현판은 당시 재임 중이었던 최규하 대통령이 썼다. 사진=오근식 객원위원

바다와 반대쪽의 처마 아래에 단정한 해서체 글씨로 월송정의 편액이 걸려 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최규하 대통령의 글씨다. 경신 (庚申)년이니 1980년에 썼다. 1979년 10월 26일부터 이 나라를 휘몰아친 정치적 소용돌이를 알아볼 단초도 월송정에 남아 있었다.

정자는 그 안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인데 월송정은 그 밖에서 정자를 바라보는 경치 역시 일품이었다. 평평하게 보이는 솔숲의 나지막한 언덕 위에 서서 월송정은 멋진 바다 경치를 품고 소나무 숲의 부족함을 채우고 있었다.

글쓴이 오근식=1958년에 태어나 철도청 공무원, 인제대학교백병원 그리고 건국대학교병원에서 일했다. 2019년 2월 정년퇴직하고, 제주 올레, 고창과 통영의 길과 섬을 걸었다. 이후 해파랑길 750km를 걷기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1,470km의 남파랑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