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기 칼럼] ‘독립신문’이 강조한 ‘만주 수복’
[뉴스클레임]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은 ‘열하일기’에서 ‘일망무제’의 만주 벌판을 바라보며 “한바탕 통곡하고 싶다”고 했다. ‘호곡장론(好哭場論)’이다.
“산모퉁이를 벗어나자 안광(眼光)이 어른거리고 갑자기 한 덩이 흑구(黑毬)가 오르락내리락한다.…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가히 한 번 울만 하구나’ 하였다.…”
고구려는 ‘옛 땅’을 회복하는 것을 ‘다물(多勿)’이라고 했다. 이 ‘다물 정신’으로 건국 이래 ‘옛 땅’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광개토대왕의 경우는 왕자 시절 임금을 도와서 9년, 재위 21년 등 모두 30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렀다. 그런 결과, ‘옛 땅’을 거의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 고구려의 국력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 ‘옛 땅’ 가운데 일부가 박지원이 한바탕 울고 싶다던 만주 벌판이었다. 고구려가 회복한 영토는 그보다 훨씬 더 서쪽의 땅을 포함하고 있었다.
‘옛 땅’이 있었다면, ‘옛 통치자’가 없었을 리 없다. 통치자가 없이 국가가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이를 악착같이 부정했다. 우리의 영역을 ‘반도 이남’으로 깎아내렸다. 그래야 ‘강제통치’하기 쉬울 것이기 때문이다.
일제의 학자들은 ‘단군’을 몽골 침략 때 위기에 처한 민족의 자주성을 높이기 위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이전의 단군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는 게 증거라고 우겼다.
그러나 ‘한단고기’에는 왕검→ 우루→ 가륵에서부터, 여루→ 보을→ 고열가에 이르기까지 역대 47명의 임금과 통치 기간까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되레 그들의 ‘천황’이 모순투성이가 아닐 수 없다. ‘일본서기’에는 120세, 140세나 장수한 천황도 여럿 나오고 있다.
하지만 천황이 아프면 신라에 사신을 보내 의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을 정도로 의술이 형편없던 일본이었다. 신라의 의사가 병을 고쳐줬더니 천황이 고마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의술로 천황이 장수를 누리기는 아마도 불가능했다. 더구나 ‘일본서기’는 누가 쓴 것인지조차 알 수 없는 ‘오리무중의 역사기록’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 역사만 왜곡하고 부인했다. 일부 우리 역사학자는 그들의 ‘식민사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우리는 국력이 한참 오그라들었던 조선 말에도 ‘만주 수복’을 주장했다. ‘다물 정신’이었다. 1896년 8월 4일자 ‘독립신문’은 이렇게 쓰고 있다.
“원컨대, 조선 사람들은… 십 년 후에 요동 만주를 차지하고 일본 대마도를 찾아올 생각을 하기를 바라노라. 하면 될 터이니, 결심하여 할 생각만 하고 못 되려니와는 생각하지 말지어다.”
중국이 만주를 차지한 것은 청나라가 망한 이후였다. 100여 년 남짓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동북공정’을 하고 만리장성을 엿가락처럼 늘리면서 굴러들어온 영토를 영원히 지배하려 하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의 ‘독도, 일본해’ 억지에 발끈하는 게 고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