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후 칼럼] 평화 리더십- 우크라이나인 안톤의 이유 없는 죽음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뉴스클레임]
안톤은 여러 차례 한국에 온 적이 있던 우크라이나의 젊은 사업가였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침공 초기 그는 산속으로 도망을 갔었다. 그런데 전쟁발발 1년여가 지난 무렵인 지난해 봄 안톤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군대에 입대 하기 전에 안부를 전한다고 했다. 산속으로 도망친 이유와 그리고 그 선택을 번복, 자진 입대한 이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묻지 않았다. 전쟁의 참혹함을 겪은 필자로서는 그의 선택을 무작정 응원하기도, 비난할 수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지인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입대 후 서너 달 만에 소식이 뚝 끊겼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있지만, 그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편치 않다. 결혼한 지 불과 두어 달 만에 벌어진 전쟁에 그의 삶은 박살이 난 것이다.
전도유망한 사업가로서, 또한 한 가정을 이끄는 가장으로 사는 삶뿐만 아니라, 그의 생사조차 알 수가 없게 됐다. 안톤 같은 사례는 부지기수일 것이다.
언론은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의 장본인인 젤렌스키와 푸틴의 얼굴을 연이어 화려하게 비춰주고 있지만, 전쟁을 겪고 있는 민초의 비참한 삶을 다룬 보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그간의 경험으로 미뤄 익히 짐작할 뿐이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전쟁, 그리고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 우크라이나가 국제역학관계를 잘못 파악해서 일어난 전쟁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나토의 배경을 믿고 러시아와의 힘을 불균형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 통한의 패착이었다.
2015년에 체결한 ‘민스크 2차 협정’을 먼저 위반한 것은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의 전략 핵심지역인 ‘돈바스 지역을 우크라이나 영토로 인정하되, 이들 지역의 자치를 허용한다’라는 것이 민스크 2차 협정의 골자이다. 이후에도 2019년에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선출된 젤렌스키가 러시아로부터의 영향력을 축소하고 나토가입 등을 시도하는 등 러시아의 도발을 끊임없이 유도한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격화된 이후에 젤렌스키는 국제사회로부터 전쟁 리더십을 인정받았다. 이는 국제사회가 젤렌스키의 전쟁 수행을 부추긴 면이 적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2022년 처칠 리더십상, 케네디 용기상 등을 연이어 받았다.
러더인 젤렌스키가 언론에서 각광을 받는 동안 민초인 우크라이나인들은 고통을 통해 그들의 무력감은 절정에 달하고 있다. 전쟁은 젊은이든 늙은이든 우크라이나인들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고 있다.
전쟁 당사국인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전쟁 중인 민중의 삶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절반은 죽은듯한 노파가 되어 있었다.”
젤렌스키 러더십은 북한과 적대 관계에 있는 우리에게도 반면교사가 된다. 2022년 말 윤석열 대통령이 ‘우월한 전쟁준비’을 제기한 이후, 언론에서 수시로 전쟁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북한의 도발수위가 높아지면 대한민국이 전술핵을 배치하고, 자체 핵을 보유할 수도 있다’, ‘ 무슨 종전선언이네 하는 상대방 선의에 의한 그런 평화는 지속 가능하지 않은 가짜 평화’등 언급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칼럼을 통해 ‘한반도 전쟁 때 생존확률 0%보다 약간 높다’라고 주장했다. 한 명의 기자 시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는 현대의 전쟁은 상호 공멸이라는 것을 시사해주는 언급이다.
평화는 전쟁준비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4세기경 로마 군사전략가 베게티우스의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라는 충언은 21세기에는 엄밀한 검증이 필요한 발상이다. 이 말은 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침략과 정복을 배경으로 한 고대 전쟁의 귀결이기 때문이다. 상호 공멸을 초래할 현대전에는 군사적 억제력과 동맹은 필수적이나 평화 자체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인류는 역사로부터 배울 줄 모르는 것 같다. 특히 정치적 리더들은 전쟁의 역사에 대해 무지몽매하다. 전쟁이 주는 막대한 피해보다는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바쁜 것이다.
세계 2차 세계대전의 직간접적인 사망자 수는 5천만 명에서 8천만 명 선으로 추정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천700만 명 선이다. 아직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에서 얼마나 사망자 수가 나올지는 아직은 알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몽고메리는 ‘전쟁의 역사’에서 전쟁의 부당함을 지적했다.
“전쟁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전쟁도 예외는 아니다. 왜냐하면, 전쟁이 남기는 것은 오로지 파괴와 슬픔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쟁을 일으키는 자는 그 의도가 무엇이든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히틀러를 용서할 수가 없다. 그의 망상으로 인해 벌어진 전쟁에서 수천만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좋은 전쟁, 나쁜 평화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리더가 아니다. 우리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평화의 리더를 원한다.
평화의 리더는 두 가지를 갖춰야 한다. 위기상황을 보는 시각이 차별화된 것이 첫 번째이고, 위기상황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원칙을 견지한다는 점이 두 번째이다. 백과사전 격인 중국 고전 ‘회남자’에서는 이를 독견(獨見) 독지(獨知)라고 했다. 독견이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을 말하고, 독지란 남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한다. 독견은 ‘밝다’라고 말하고 독지는 ‘신묘’하다고 말한다. 모름지기 독견과 독지로 세상에 대한 내면의 편견과 무지를 극복한 자만이 진정한 리더로 거듭날 수 있다.
젤렌스키 사례에서 보듯이 자신만의 시각과 앎(독견과 독지)이 부족한 리더는 주변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전쟁과 평화중에서 자신들도 모르게 좋은 전쟁(?) 속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