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에 서서] 자전거 가지러 가는 길

가로등은 어디에서든 푸르스름한 불빛을 비춘다

2024-10-28     정보철 편집위원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아침 일찍이 강에 도착했지만 해가 질 때까지 나룻배에 선뜻 오르지 못하고 있었다. 나룻배를 타면 단숨에 저편 강 건너에 닿을 수 있겠지만, 강가를 온종일 서성거릴 뿐이다. 무슨 까닭이 있다는 말인가?

이제 곧 밤이 된다. 짙은 어둠이 몰려와 온 사위를 삼켜버릴 것이다. 강 건너 저편의 어떤 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나는 좌절할 것이다. 그리고서 자신을 스스로 설득할 것이다.

“강 건너 저편에는 깜깜한 어둠 속이라서, 건너가 봤자 득 될 것이 없을 것이야.”

저녁 무렵, 강 건너 저편은 물안개로 이미 시야가 뿌옇다. 강을 건너는 것은 시간상 상당히 어려워졌다. 그런데 나는 강가에서 발을 쉬이 돌리지 못하고 있다. 눈가에 아른거리는 강 건너 저편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이대로 돌아설 것인가?

또다시 꿈이다. 근래 들어 연이어 같은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는 나룻배인지, 나룻배를 타고 건너는 사람인지 확실치는 않다. 언젠가는 사람 없는 나룻배만 보이고, 어느 때는 빈 나룻배 앞에서 서성거리는 남자의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무엇이라도 좋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룻배를 탈 수 있는지’의 여부다. 

“가져가. 자전거 오늘 가져간다고 했으면 약속을 지켜줘.”

카톡 메시지를 본 것은 잠에서 깨어난 지 한 시간여가 지난 뒤였다. 다리 난간에 자전거가 묶인 사진도 동시에 배달되어있었다. 내가 수유리 4.19탑 계곡에서 우이동 골짜기로 이사를 하면서 놓고 온 자전거를 말한다. 

밤 11시 20분, 서둘러 가면 오늘 중으로 자전거를 가져올 수 있는 시간이다. 10월의 마지막 주, 이제는 밤공기가 차다. 스산한 밤공기를 가르며 나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발걸음이 바빠졌다. 12시가 되기 전까지는 10여 분이 남았다. 메시지의 주문처럼 오늘 자전거를 가져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나는 서둘렀다. 솔밭공원을 지나 수유리 4.19탑 사거리 코너를 돌았다. 

사실 메시지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자전거를 가져오는 것을 내일로 미루려고 했다. 초저녁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깬 시간이 밤 10시였다. 난 자신에게 핑곗거리를 만들었다.

“오늘은 늦었어. 더구나 오늘 나는 피곤 하잖아.”

나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게으름, 핑계, 행동보다는 생각 그리고 합리화가 나의 정체성이었다. 오늘의 일만 해도 그렇다. 이사 가는 상황, 짐을 덜어야 하는 처지에서는 오래된 자전거는 애물단지였다. 당근에 팔려는 자전거를 굳이 가져가겠다고 주장했었다. 그래놓고 나는 초저녁부터 잠을 청했고, 그리고 한밤중에 일어나서 내일로 미루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는 동안 메시지는 이어졌다.

 “아무리 귀찮고 힘들어도 포기하지 마.” 

그 메시지를 읽는 순간 내가 싫어졌다. 꼭 이런 말을 들으면서 살아야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마음 한편으로는 ‘그까짓, 자전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별거 아닌 것 갖고 요란 떠는 것일 수도 있다. 시답지 않은 일을 가지고 과장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 삶이 항상 이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쓰라렸다.

지나놓고 보면 곁가지에 불과한 것을 신줏단지 모시는 등 나의 삶은 항상 과녁을 이탈했다. 누구 말대로 봉투부대에 불과한 자들에게 수없이 기대한 것 또한 경멸할만하다. 여기서 봉투부대는 항상 껍데기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자들을 말한다. 봉투는 속에 아무것도 없는 빈 봉투이다. 빈 봉투의 특징은 말이 화려하다는 것이다. 화려한 말에 조금만 기울이면 부질없는 말들의 잔치인 것을 알 터인데, 그 화려한 말들의 장단에 맞춰 춤을 춘 것은 어리석은 나였다. 

경북 영천의 선생님은 종종 내게 경고했다. 

“그들은 봉투부대입니다.”

어쩌면 내가 봉투부대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나는 그 생각을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삶은 항상 그러했다. 사람들이 타인에게 던지는 말은 얼마 안 가서 내게로 돌아왔다. 마찬가지로 내가 상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곧 상대가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일 수도 있다. 

나는 안다. ‘내 주변에 떠도는 말들은 언젠가는 내게 돌아올 것’이라는 것을 나는 절실하게 깨닫고 있다. 이런 도돌이표 쳇바퀴를 벗어나는 길은 내게는 딱 하나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봉투부대 사람들과 관계를 딱 끊는 것, 그것도 단칼에 탈탈 털어버리는 것이다.

4.19 탑을 지나자 이곳이 한적한 곳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같은 수유리 지역인데도 밝음과 어둠은 공존한다. 

자정 무렵, 수유리 역 근처는 화려한 불빛으로 어른거릴 터인데, 이곳은 가로등이 처량하게 인적이 끊긴 길을 밝힐 뿐이다. 가로등이라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6.25 전쟁 후의 암담한 한국사회에서 열정과 자유의 상징이 되었던 전혜린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나오는 푸르스름한 불빛을 뿜어내는 가스등 아래를 걸어가는 여인의 모습이다. 가스등 이야기는 당시에 모든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꿈의 상징이었던 독일유학에서의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31살의 나이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평소에 검은 옷을 즐겨 입었다고 했다. 인적이 끊긴 길 위에 비치는 희미한 가로등 불, 그리고 검은 옷이 한 묶음으로 다가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갑자기 그때가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수유리 4.19탑 골짜기 쫓기 듯 내몰렸을 무렵, 얼큰하게 취한 내가 길을 걸어 올라갈 때면 가로등 불이 항상 나를 애처롭게 비춰주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수유리 골짜기를 떠나야만 했다.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서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에서 몇 달을 머물렀다. 이국땅에서 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골목길에 들어서면 항상 가스등 불이 나를 처량하게 비추었다. 그곳의 가스등 불빛 역시 항상 푸르스름하고, 희미했다. 독일의 가스등 아래를 걷는 전혜린처럼 나도 타슈켄트 골목의 가스등 아래에서 수없이 숨죽여 울었다.

귀국 후 나는 어둠 속에서 항상 이 길을 항상 걸어 올라갔지만, 이 길이 한적하고, 그리고 외로운 길이라는 것을 오늘 그리고 지금에서야 알았다. 정말 인생에서 사소한 것은 없다. ‘그까짓, 자전거’를 가지러 가는 길에 이러한 다양한 감정을 느끼다니!

5분여를 더 가면 조그만 다리가 나온다. 다리 건너편에 자전거가 놓여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다시 우이동 계곡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약속한 대로 오늘 중으로 자전거를 가져가는 것이 된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말을 뱉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로소 나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돌아오는 길, 기대와는 달리 자전거를 탈 수 없었다. 오랫동안 타지 않은 자전거는 바람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끌고 우이동 골짜기에 돌아온 시간은 새벽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 항상 이렇지.” 

나는 자조했다. 내게 뭔가 맞아떨어지는 일이 없다. 강력한 자극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제 다시 꿈을 꿀 시간이다. 꿈속에서 강가의 나룻배가 나타날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오늘은 과연 나룻배를 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