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기 칼럼] 히틀러가 망친 쿠르스크 전투
[뉴스클레임] 2차 세계대전 당시였던 1943년 독일은 ‘쿠르스크(kursk) 전투’에 독일군 최고 전략가 만슈타인 장군을 앞세워 소련군 공략에 나섰다. 만슈타인 장군은 쿠르스크의 ‘돌출부’를 주목했다. 주먹처럼 튀어나온 곳이라 공격하기 좋을 것 같았다.
히틀러는 전투를 만슈타인에게만 맡기지 않았다. 전차전에 뛰어난 구데리안 장군도 불러들였다. 그의 ‘저서’를 읽고 내린 결정이었다.
히틀러는 중(重)전차 ‘타이거’와 중(中)전차 ‘판터’를 제조해서 부족한 전차를 보충하도록 했다. 그런 후에 대공세를 펼치자는 것이었다. ‘치타델(Citadel) 작전’이었다. ‘작전 개시일’을 5월 3일로 잡았다.
하지만 전차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작전 개시일은 5월 12일로 연기되었다. 그리고 또 6월 12일로 한 달을 늦췄다, 독일군의 장비가 아직 열세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것도 또 연기해야 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의 전황이 불리해졌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작전 개시일은 7월 5일로 연장되었다. 두 달이나 지연된 것이다.
소련군은 그런 독일을 꿰뚫고 있었다. ‘루시(Lucy) 정보망’ 덕분이다. 루시는 스위스에 있는 소련 첩자 ‘루돌프 뢰슬러’의 암호명이었다. 루시의 정보는 히틀러가 ‘치타델 작전’ 서류에 아직 ‘사인’도 하기 전에 알고 있었을 정도였다,
작전 개시일이 늦춰지면서 독일군은 기강이 흔들려야 했다. 반면 소련군은 확보된 정보에 따라 방어기지를 견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독일 기갑군의 ‘주특기’는 기갑부대가 적의 정면에 좁고 깊숙한 돌파구를 만들고 보병이 따라붙어서 돌진하는 것이었다, 1939년 폴란드, 1940년 프랑스, 41년 러시아에서 성공한 전략이었다.
소련군은 여기에 맞서서 ’종심방어전법‘으로 독일 기갑군 공격을 둔화시켜왔다. 쿠르스크에도 그 ‘종심방어진지’가 구축되었다.
독일군은 이를 깨기 위해 작전을 바꿨다. 정면이 아닌 남쪽과 북쪽 양측에서 공격한 것이다. 90만의 병력, 전차와 자주포 2700대를 동원했다,
그러나 소련의 정보망은 ‘치타델 작전’의 ‘상세한 시간표’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7월 5일 오전 2시 30분을 기해 포격을 시작할 예정이었는데, 소련군은 그 10분 전인 2시 20분에 ‘선제 포격’을 날리고 있었다. 소련도 병력 134만에 3300대의 대규모였다.
결국, 작전을 두 달이나 늦춘 히틀러의 우유부단 때문에 독일은 승리를 놓치고 말았다.
이 ‘머나먼 유럽’의 쿠르스크가 우리에게도 관심이다. 북한군이 파병되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군은 북한군을 포함한 5만 명의 러시아군과 교전 중이라는 소식이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장남 트럼프 주니어가 우크라이나를 조롱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트럼프 당선인 옆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진 위에 “용돈을 잃기까지 38일 남았을 때의 모습”이라며 비아냥거리는 영상을 올렸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인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지상 최고의 세일즈맨”이라고 평가절하하더니, 그의 아들이 또 속을 긁어대고 있다. ‘우방’의 지원으로 피를 흘리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응원해도 부족할 판에 악담이다. 마치 ‘부전자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