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에 서서] 당신에 의한 ‘저것’의 삶
아버지 묘지를 찾아가는 길
[뉴스클레임]
하필이면 이 책을 골랐을까?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우연이 나의 삶을 지배할 줄은 몰랐다.
“아무 책이냐 고르렴.”
나는 선뜻 두 권의 책을 선택했다. 단지 제목이 맘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책을 손에 쥐었을 때 아버지는 알 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소설 형식의 철학책은 그때부터 나와 항상 동행했다. 군 복무 시절뿐만 아니라, 내 생에 가장 암담했던 신문보급소에서도, 습기 가득한 지하창고에서도 나는 이 책을 놓지 못했다. 지금도 이 책은 우이동 골방의 책꽂이에 꽂혀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이냐’에서 심미적 삶을 다뤘고, ‘저것이냐’에서는 윤리적인 삶을 얘기했다. 저자는 내심 독자들에게 ‘저것’의 삶의 선택을 은근히 강요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결여하고 있는 것이 윤리적인 삶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이 윤리적인 삶을 선택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부대 복귀 전날, 아버지는 뜻밖에도 나의 삶에 대한 태도를 물어보았다.
아버지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감성을 중시하는 심미적인 삶의 태도도 중요하지만, 책임과 의무를 중시하는 윤리적인 삶도 중요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말들이 떠돌았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했던 나는 다만 속으로 중얼거렸다.
‘당신과 같은 ’저것‘의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라는….’
군대 말년에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을 때, 맨 처음 떠오르는 것은 서점에서의 아버지 모습이었다. 책값을 지불하려고 양복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아버지의 등은 유난히 구부러져 있었다. 우체국과 이성당 제과점 사이에는 있었던 조그만 서점, 당시 군대 첫 휴가 중인 나는 아버지와 함께 그곳을 찾았었다. 그 발길이 아버지의 마지막 외출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처음 아이들이 할아버지 묘지를 얘기했을 때 나는 숨기고 싶은 무언가를 들킨 기분이 들었다. 특히 아이들은 명절이 되면 남들처럼 성묘를 가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지난 연말에 우리 가족은 묘지가 있는 군산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나는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묘지가 어떻게 변했을지 몰랐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아버지 묘지를 찾지 않은 것은 남들에게 말하기 힘든 이유가 있었다. 여러 사연으로 남의 산에 아버지 묘지를 마련한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아버지 묘지를 관리하던 산지기가 돌아가신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버지 묘를 마련하도록 도움을 준 그 마을 아버지 친구분이 돌아가셨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따라서 연고가 사라진 곳에 아버지 묘지를 모신 것이 죄스러웠고, 또한 부끄러웠다. 그것은 꽁꽁 감추고 싶었던 수치였다. 의식 저편 깊숙한 곳에다가 묻어두어야 했던 지난날의 잘못을 끄집어내는 것은 감당하기 버거웠다.
변명하자면 처음 한두 해 묘지를 찾는 것이 미뤄지자, 나는 아버지 묘지를 찾는 대신 묘지 이장과 납골당을 고려했다. 그러나 그 한두 해가,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벌써 10여 년의 세월이 되었다니!
묘지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떠오른 것은 아버지와 함께 성묘를 다니던 기억이었다. 명절날 오전에는 버스를 타고 아버지와 함께 묘지에 다녀와야 했다. 차멀미로 힘든 나를 뒤에 두고 아버지는 성큼성큼 앞서 나갔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아버지 뒤꽁무니를 간신히 쫓아가곤 했다. 묘지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도 뒤돌아서서 내게 말을 걸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버지는 무뚝뚝했다.
아버지 묘지를 찾아가기로 한 전날 밤,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밤새 잠 못 이루다가 결국 새날이 되어서야, 나는 책꽂이에서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외출에서 산 바로 그 책이다.
지금처럼 접착제로만 제본한 책과는 달리 당시의 책은 한올 한올 실로 제본돼 있어서, 오래되었지만 흩어짐이 전혀 없었다.
생각해보니 단단한 제본으로 여민 책은 아버지 삶을 닮았다. 아버지가 선택한 삶은 ‘이것’이 아니고 ‘저것’이었다. 저것의 삶은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윤리적인 삶이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것은 지독한 권태로운 삶이었다. 허나 심미주의자에게 권태는 악의 근원일 따름이다.
‘저것’의 삶의 또 다른 특징은 타인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교육자로서 평생을 살다 가신 아버지는 타인의 시선에 방점을 두었다.
나는 ‘저것’의 삶이 못내 불만이었다. 나는 도저히 그런 삶을 조금이라도 수긍할 수 없었다.
“고리타분하고 권태로움을 당연시하고, 타인의 시선에 좌우되는 삶이라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것’이라는 심미적인 삶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심미적 삶의 특징은 아름다움, 아름다움은 사색과 논리, 주장, 말다툼 궤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아름다움과 경험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생의 대부분을 보낸 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다. 경험은 시간의 진행에 따라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자기 것 화했을 때만이 가능한 실체이다. 따라서 경험의 깊이는 받아들이는 자의 의식이 결정한다. 의식이 부족한 자는 그저 시간을 보낼 따름이다. 나 역시 ‘이것’에 대한 자각 없이 허송세월만 보냈다는 말이다.
묘지가 있는 산밑에 도착했다. 아이들이 제사음식을 챙기는 동안 나는 먼저 묘지로 향했다. 뭔가 묘소에 일이 벌어졌을 것 같은 생각이 나를 압박했다. 눈이 쌓인 산속으로 뛰어들어갔다. 눈 속에 발이 푹푹 박히고, 가시로 뒤덮인 도깨비 풀이 앞길을 가로막아도 나는 거침없이 묘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불길한 예감은 왜 잘 들어맞는 것일까? 묘지에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져 있었다.
묘지가 있던 자리에는 잡풀과 잡목만이 우거져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아버지 묘지 인근의 묘지들도 동시에 사라졌다. 이 사실 때문에 행여 주변에 이장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를 품을 수는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한참 동안 이곳저곳의 묘지 비석을 일일이 살펴보았지만, 소득이 없었다. 나는 점점 초조해졌다. 찾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조바심으로 드러난 것이다. 절망감이 엄습하고, 덩달아 몸은 점점 지쳐갔다. 어떻게 산에서 내려왔는지 모른다.
그날 밤 숙소에서 나는 도깨비 풀을 하나하나 묵묵히 떼어냈다. 산속을 헤맬 때 옷은 물론, 머리카락에까지 엉겨 붙은 도깨비 풀이다. 아버지의 혼백이 도깨비 풀에 따라온 것만 같았다. 사위와 딸이 도깨비 풀을 같이 떼어내면서 침통해있는 내게 희망을 불어넣었다.
다음날, 아버지 묘지 이장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 묘지 주변의 묘지주인을 수소문 끝에 연락했다. 그 마을 토박이인 택시기사였다.
“그럴 리가 없는디유.”
택시기사는 내 말을 거듭 부정했다.
“몇 달 전, 그러니까 추석날에도 어머님 산소를 찾았거든요. 그게 사라졌다니…”
택시기사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그가 말하는 묘지와 내가 찾고자 하는 묘지 자리가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 것이다.
정확히 5분 뒤에 쏜살같이 택시를 몰고 온 택시기사가 지적한 곳은 역시 아버지 묘지 자리가 아니었다. 한바탕 해프닝이었다.
다시 산을 올랐다. 몇 시간째 산정상 주변에 산재한 비석을 하나하나 헤아리고 있을 때였다. 어제 처음 만난 최 씨 아저씨 전화를 받았다.
“계곡 중간에 축대를 쌓은 후 만든 무덤이 있을 겁니다. 그 무덤 주변을 살펴보세요.”
아버지 친구인 최 교장이 죽기 전에 자신의 무덤을 미리 축조하면서, 나의 아버지 무덤을 같이 이장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최 씨 아저씨는 확실하지는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한 가닥 기대를 걸 수 있었다.
겨울철이지만 잡목으로 우거진 산속이라서 축대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다시 산밑으로 내려와 처음부터 계곡을 훑으면서 올라갔다. 눈에 띄는 조그만 돌무더기만 보여도 찾아가서 주변의 무덤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그러기를 여러 번, 해는 서산에서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포기할 때가 된 것이다.
실망스럽고 지친 몸을 이끌고 하산하는 중, 딸아이가 어느 지점을 가리켰다. 평소 기운이 남다른 딸아이였다. 순간적으로 짜릿한 기운이 묘지 쪽에서 나를 향해 뻗쳐왔다. 덩달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몸이 푹 처진 상황인데도 갑자기 함이 솟아났다. 아들과 나는 동시에 그곳으로 달려갔다.
눈 덮인 묘비를 맨손으로 급히 훑었다. 그리고는 나는 산이 떠나가도록 소리쳤다. 동시에 묘지를 찾기 전,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던 마음의 갈등이 한순간에 사라졌음을 감지했다.
“찾았다!”
서울로 돌아오고 나서 아버지가 난생처음 꿈에 나타났다. 집으로 들어서든 아버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전히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무장한 얼굴이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눈빛은 내게 무엇인가를 묻는 것만 같았다. 나의 착각일까?
그 순간, 꿈에서 깨어났다.
내가 앞으로도 삶의 방향을 결정짓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산다면 나의 남은 인생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을 것이다. 나는 수축되고 또 위축된 삶을 살다가 사라질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삶의 교차로에서 길을 잃었다, 어줍게도 이것과 저것 두 가지를 동시에 선택하려는 어리석음을 보였다. 두 가지 선택이라는 말은 결국 하나도 선택하지 못한 것의 또 다른 용어일 뿐이다. 결단력 없이 우물쭈물하다가 세월만 보냈다는 것은 분별력 탓이고, 분별력이 흐려지면 방황하기 마련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