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에 서서] 전화기 숫자가 사라졌다
’도움‘의 사회학서설
[뉴스클레임]
숫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다음 숫자를 눌러야 하는데, 숫자가 보이지 않는다.
공중전화기 아래로는 동전이 수복이 쌓여 있지만, 전화번호를 마지막까지 누른 적이 없다.
항상 비슷한 꿈을 꿨다. 공중전화기에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그것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
결국, 전화를 걸었다. 한여름 내내 망설이다가 여름이 지나갈 무렵이었다.
“도와줘.”
지난 늦여름, 분당의 한 카페에서 나는 말을 더듬고 있었다. 담담한 채 말을 이어가려 했지만, 자꾸만 말이 헛나갔다. 당연히 나는 도움을 줬었던 지난날을 끄집어내지 않았다. 만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그를 불러낸 것을 후회했다.
“오늘 일은 잊어버려라.”
우리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국밥을 먹었다. 배고프지 않는데도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이대로 헤어진다면 서로가 어색했기 때문이다. 식사 도중 나는 애써 괜찮은 척했고, 상대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는 가볍게 악수를 했다. 여전히 가벼운 미소를 띤 채….
마치 오늘을 반복하는 것처럼, 나의 도움, 그리고 어김없는 상대의 배신은 늘상 벌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보답이 있다면, 입에 넣는 즉시 토할 만큼 역겨운 썩은 생선일 따름이었다. 나의 선의는 짓밟히고 매도당했다. 어느 새부터인가 나는 서서히 사회로부터 매장되고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치는 타인들의 불합리한 합리에 나는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그 누군가로부터 꼭 집어서 ’나의 운명을 죽이려는 음모가 진행되지 않고서는 이런 일이 벌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너무 뒤늦은 깨달음이었을까?
연이어 배신을 당하는 것은 이번 생애에서 쌓인 업보가 작용하는 것 같다. 카르마는 지난 생에서 쌓인 것이라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빌어먹을 업보라니.”
카르마라면, 스무 살 때의 일이다.
추운 겨울밤, 나는 종종걸음으로 친척 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인기척을 느꼈다. 힐끗 쳐다보니 일찍 문 닫은 가게 천막의 구석이 눈에 띄었다. 미약한 신음으로 보아서 늙고 허약한 노숙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겁하게도 그 신음을 못 들은 척하고, 갈길 바쁜 사람처럼 걸음을 빨리했다.
내가 가고자 했던 곳은 단칸방에 세 식구가 사는 친척 집이었다. 어머니와 자매 두 명 등 여자만 사는 곳이었다.
“그렇더라도 당시 나는 어떠한 행동을 해야만 했을까?”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면, 한밤중에 자다가 벌떡 일어난다. 희미하게 애원하는 노숙자의 신음이 들리기 때문이다. 고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날은 어김없이 치명적인 상처 부위에 예리한 칼날이 반복해서 꽂혀있다.
분당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여름 해가 고층건물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림자 속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그리고는 건물과 건물 사이의 어두운 골목에서 서성거렸다. 쏟아지는 감정을 홀로 감당키 위해서였다.
골목에 들어가기 전, 불빛에 스멀거리는 거리의 그림자들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엉뚱하게도 성경에서 나오는 ’롯의 아내’를 생각했다. 신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면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조건을 붙여 도망갈 수 있게 허락했다. 허나 뒤를 돌아봐서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으로 변해버린 ’롯의 아내‘ 얘기가 불쑥 떠올랐다.
“지난날을 후회하면서 돌아보면 사실상 소금에 절어진 덩어리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지난날, 인생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을 인정한다. 표면을 겉돌 뿐 인생의 깊이를 모르고 살아왔다. 날마다 속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골목을 벗어났을 때는 도시를 밝히는 불빛이 내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거리를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불빛에 그림자들이 난무했다. 산 자들의 거리였다.
그러나 나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죽은 자에게는 그림자가 없다. 그림자는 이제는 거추장스러운 것일 따름이다. 스스로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나의 문제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기게스의 반지‘에도 놓여있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기게스의 반지’를 언급했다. 양치기 기게스는 우연히 습득한 ‘기게스 반지’를 끼고 투명인간이 된 다음 왕을 살해하고 왕관을 차지했다.
‘그런 마법의 반지를 가진 자는 누구든 윤리기준을 내던져라’라는 사회통념에 대해서 부잣집 도련님 글라우콘이 빈정대듯이 물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불의가 어떤 이익을 주더라도 올바른 일을 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하다“라고 대답했다. ‘어떤 상황에서든 조건을 따지지 않는 옮음만이 정의’라는 것이다.
즉 도움은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냉정한 거래일뿐이다. 도움을 줬는데, 돌아오는 것이 없다고 원망하는 것은 순수하지도, 투명하지도 않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없는 자에게 퍼붓는 악랄한 짓일 수도 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대에게, 즉 내게 줄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없는 자에게 손길을 내미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도움이다. 도움은 주는 것일 뿐, 이것이 진정한 카르마 법칙이다.
그날 이후로 공중전화기 앞에 서 있는 꿈을 꾸지 않는다. 아니 딱 한 번 꾼 적이 있다. 그날은 숫자를 찾아내서 기어코 전화번호의 번호를 다 눌렀다. 그러나 정작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내가 전화기를 내려놓은 상태였다. 상대의 목소리가 전화기로 연이어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이제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상대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도움을 줄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