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여행] 이천리 해파랑길 속초 남단 설악항에서 영랑호를 거쳐 북단 장사항까지 해안 곳곳을 누비는 길
해파랑길45코스
[뉴스클레임]
해파랑길45코스는 속초 해안을 중심으로 꼭 보아야 할 곳을 모두 지나는 17.6km의 길이다. 속초 남단의 설악항과 해맞이공원을 출발해 대포항, 외옹치항, 속초해수욕장, 청초호 입구의 아바이마을과 중앙시장, 영금정과 속초등대 그리고 영랑호를 한 바퀴 돌아 장사항에서 끝난다. 속초시에 속한 유일한 해파랑길 코스다.
설악항 근처의 공원을 잠시 거닐며 바닷가 바위 위의 인어연인상과 기타 조각상들을 슬쩍 살피고 잠시 걸으면 대포항이다. 늘 횟집에서 손님을 부르는 소리와 횟집을 찾아 이곳저곳을 살피며 걷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질척이는 곳 없이 깨끗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수산시장과 활어시장에 발을 딛는 순간 날아오는 상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럽다. 코로나19의 여파로 사람들 발길이 뚝 끊어졌으니 배낭 메고 어슬렁거리는 두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커 보인다. 미안한 마음에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대포항 북쪽엔 바닷가에 호텔과 리조트로 사용되는 거대한 건물이 장벽처럼 서 있다. 그 너머에 외옹치항이 있다. 허름한 횟집들이 있을 뿐 이곳 역시 인기척이 드물다. 옛날 항구의 횟집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곳이다. 신작로가 없던 시절 대포항에서 속초 시내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외옹치항 뒤의 고갯길이었다. 이 고갯길 옆으로 밭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밭뚝재’라는 이름이 붙었고, 세월이 지나며 발음이 변해 독재가 되었다. 이를 다시 한자로 바꾸어 ‘바깥 독재’라는 뜻의 외옹치가 되었다고 한다. 밭뚝재가 바깥옹기재로 변한 것이다.
외옹치항을 지나 바닷가의 산책로로 들어서면 ‘속초사잇길 바다향기로’라는 길 이름이 붙어 있다. 이 해안을 돌아 속초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외옹치해변까지 약 1km의 길이다. 대체로 야자 매트가 깔려 있거나 나무데크를 이용해 길을 만들었기 때문에 가볍게 산책하며 바다를 감상하기 좋은 길이다. 백사장에 이르기 전 길옆에 철조망과 철책이 남아 있다. ‘안보철책선’이라는 제목 아래의 설명에 따르면 이 외옹치해변은 과거 65년간 군사작전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가 개방되었고, 방문객들이 분단이라는 현실을 생각할 수 있도록 일부 구간을 철거하지 않고 남겨두었다고 한다.
외옹치해변은 속초해수욕장과 이어진다. 전체 백사장 길이가 1km 남짓한 이 해수욕장은 속초 유일의 해수욕장이다. 백사장이 끝나는 곳에 대관람차가 천천히 돌고 있었다. 최근 이 대관람차 사업과 관련해 잡음이 들린다. 최악의 경우 철거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바닷가의 주택가를 두리번거리며 걷다가 높이 솟은 다리 위에 올라섰다. 바다 쪽엔 아바이마을이고 시내 쪽엔 청초호와 중앙시장이 있다.
아바이마을은 육이오전쟁 때 함경도 출신 실향민들이 터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아바이마을은 2000년 가을 KBS2TV에서 방영된 드라마 가을동화를 촬영하고 널리 알려지면서 속초의 대표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마을 골목의 건물들은 여전히 초라함을 벗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 식당인데 주로 함흥냉면, 오징어순대 등 함흥지역의 향토 음식을 팔고 있다. 젊은이들이 방문이 많아지면서 카페가 많이 생겼다.
아바이마을과 속초 시내를 연결하는 갯배도 아직 사용되고 있다. 청초호 하구의 50여 미터 물길을 건너는데 동력을 이용하지 않고 사람이 줄을 당겨 배를 움직인다. 과거엔 이 갯배가 아바이마을 사람들에게 중요한 교통수단이어서 우마차까지 실을 정도로 큰 배를 이용했지만, 이제는 다리가 연결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체험용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여전히 주민들에겐 유용한 교통수단이다.
갯배선착장에서 시내 방향으로 골목길을 들어서면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식당에 입장을 기다리는 손님들이 줄을 서 있다. 속초중앙시장은 크다. 사람도 많다. 이 당시 코로나19 때문에 사람들이 외출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는데 이곳은 예외였다. 오래전부터 속초 주변의 부대에 복무했던 군인들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며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음식이 닭강정인데, 이제는 여러 가게가 성업 중이다.
중앙시장에서 나와 속초항 여객선 터미널을 지나면 항구 내의 항구인 동명항이 보인다. 그 뒤에 일출과 야경이 아름답다는 영금정이 있다. 높지 않은 바닷가 언덕 위에 정자가 보인다. 올라 보니 멀리 설악산 능선이 하늘을 가르고, 속초 시내가 한눈에 보인다. 바다는 일망무제의 망망대해다. 저 아래 넓은 암반 위에 화강암 다리로 연결된 정자가 하나 더 있다. 지금 올라 있는 바닷가의 정자는 저 아래 바다 위의 영금정을 바라보는 전망대다.
현재 영금정이 있는 곳엔 바위산이 있었다. 산 위의 괴석들이 정자처럼 보이고 파도가 아래쪽 바위를 칠 때마다 신비한 음악이 들리는 듯했다고 한다. 석산 위엔 아무도 없으니 산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이라고 해 바위산에 영금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 속초항 공사를 하면서 영금정의 바위를 석재로 사용한 탓에 넓은 암반만 남았다. 1997년 이 일대에 사는 주민들이 기금을 모아 정자를 세웠고 이듬해 속초시에서 다리를 건설했다. 현재의 화강암 다리는 과거의 다리를 철거 후 다시 설치했다고 한다. 영금정전망대와 영금정의 야경이 궁금하다.
영금정에서 나오면 길은 영랑호로 들어간다. 호수 둘레가 7km가 조금 넘는다. 영랑호 역시 동해안의 다른 호수들처럼 모래 등이 쌓이면서 바다와 분리되어 만들어진 호수다. 영랑호는 오래전부터 널리 알려져, 신라 시대엔 화랑들이 방문해 머물던 곳이었다. 영랑이라는 이름의 화랑이 이 호수에 매료되어 오래 머문 이후 그의 이름을 호수에 붙였다고 전해진다.
영랑호 산책로는 물가로 나무데크를 설치해 만들어서 걷기에 편안하다. 어떤 이들은 도로에서 자전거를 즐기기도 한다. 곳곳에서 주민들이 걸으며 호수의 경치를 바라본다. 특히 설악산을 바라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안개가 산을 슬쩍 감춘 탓에 신비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물가 잔잔한 곳에 새들이 무리 지어 물속을 바라보고 있다. 걸으며 보이는 영랑호의 모습은 끝없이 변한다. 부지런히 걷는데도 도무지 지루하지 않다.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부교가 보였다. 최근 TV에서 방영된 생태 관련 프로그램에서 이 다리로 인해 이곳을 찾는 철새의 종류와 개체 수가 많이 줄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호수 위를 걸으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이 다리가 과연 이 자리에서 계속 찾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범의 모습을 닮았다는 거대한 바위들이 쌓여 있다. 범의 모습을 찾고 있는데 함께 걷던 아내는 풀을 살피고 있었다. 아내의 부름에 발길을 돌렸는데 거기 타래난초가 연분홍 꽃을 자랑하고 있었다. 꽃이 매우 작아서 어지간히 자세히 살피지 않고서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살펴보니 여기 저기 많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딱 꽃피는 시기에 맞추어 와서 정성 들여 찾지 않으면 절대로 그 모습을 허락하지 않는 꽃이다. 행운이다. 경포호의 멋진 경치와도 바꾸고 싶은 꽃이었다. 사진으로만 보던 이 꽃을 걷다가 어디선가 꼭 보고 싶었는데, 그곳이 영랑호 주변 산책길이었다.
글쓴이 오근식=1958년에 태어나 철도청 공무원, 인제대학교백병원 그리고 건국대학교병원에서 일했다. 2019년 2월 정년퇴직하고, 제주 올레, 고창과 통영의 길과 섬을 걸었다. 이후 해파랑길 750km를 걷기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1,470km의 남파랑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