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선에 서서] 가난한 자의 운수 좋은 날

-아버지의 자장면

2025-04-21     정보철 편집위원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다음 주에 다시 한번 와 주셔야겠네요.”

오늘 치료는 허리 쪽에 집중하고, 일주일 후인 다음 주에는 어깨와 목 부분을 치료하겠단다. 의사 선생은 내 몸이 한꺼번에 주사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들었다.

원인을 찾은 것은 다행이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요추(허리뼈) 부위가 뒤틀려있었다. 몇 달 전부터 간혹 허리에 통증이 실리고 다리가 저렸었다. 

다음 주에 다시 와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음은 다소 무거워졌다. 사실 오늘 새벽까지만 해도 병원방문을 미루려고 했다.

왕복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병원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아픔 몸을 이끌고 버스와 지하철을 세 번이나 갈아타야 하는 것은 고역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를 말렸다.

“왜 그렇게 멀리 가는 거야. 서울에서도 좋은 병원이 많은데…”

서울도 아닌 부천의 허름한 병원을 찾아가는 내가 이해가 안 된다는 얘기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기만 했다. 그들을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대학병원을 비롯한 스무 남짓 병원에 다녀 보다가, 결국 이 병원을 찾아냈다. 이곳은 소위 ‘환자와 의사의 궁합’이 맞는 병원인 것이다.

병원은 부개역 인근의 재래시장 안에 자리하고 있다. 병원문을 나서자 오늘따라 눈에 띄는 것은 맛깔스러운 시장 음식들이었다. 순대 만두 튀김 잡채 어묵 빈대떡 등을 힐끗 쳐다보면서 시장 안을 천천히 걸었다. 주머니 속의 지갑을 몇 번이나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지갑에 돈이 들어온 것은 겨우 어제의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계약을 하게 되었고, 계약금이 곧바로 들어왔다. 

그것은 사정이 확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은 병원 치료도 받았고, 먹고 싶은 것도 생겨났다. 엊그제만 해도 먹는 것에 대한 욕망이 없었다. 아니 ‘식욕을 억누르고 있었다’라는 게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느슨해지는 마음을 바로 잡았다. 괜히 액운이 낄까 봐 조심스러워졌다. 손으로 바지 속의 지갑의 두께를 가늠하면서, 자숙(自肅)을 다짐했다. 천 원짜리 하나라도 허술하게 쓰고 싶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기분을 내면 안 되겠다.” 

돌아오는 길, 부개역에서 출발했다. 앞으로 거의 2시간을 가야 한다. 

통증은 사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오늘 치료 못 한 어깨와 목이 마음에 걸렸다. 그나마 허리를 치료한 것만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운수 좋은 날, 불편한 생각으로 마음에 생채기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더구나 오늘은 지갑이 두둑하지 않은가!”

잠시 졸았다고 생각했는데, 지하철은 어느새 한강을 건너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봄의 내음이 물씬 풍겨온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저 멀리 물이 오른 나무들이 싱그럽다.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이다. 

내가 서울역에 내린 것은 돌발적인 상황이었다. 순간적으로 기차표를 끊고 싶다는 생각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여정에 대한 갈망은 방랑자에게는 필연적인 운명이다. 가난한 자에게는 그 지역에 머물 운명만 주어진다. 그들에게 어디론가 떠날 운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운명은 돌연성과 불규칙성이라는 속성을 갖고 있다. 어떤 방향으로도 튈 수 있는 돌발성으로 우리를 무방비 상태에 놓이게 만드는 것은 운명의 횡포함이다. 우리는 운명이 저지르는 가늠할 수 없는 난폭성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한다. 삶에 대한 그런 투명한 자세는 특히 가난한 자에는 더욱 요구된다. 

그러기에 갈 수 없는 나라, 특히 갈 수 없을 때 가난한 자에게도 떠남에 대한 갈망은 더욱더 깊어지지 않을 수 없다.

집으로 달아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지하철을 타러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잠시 잊고 있었던 통증이 어깨를 짓누른다. 어깨를 어루만지면서 지하철에 올랐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승객들이 많아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부딪히다 보니 어깨의 통증이 더해간다.

그러나 동대문에 내린 것은 통증 때문만은 아니다. 지하철에서 ‘동대문’ 도착을 알리자, 나도 모르게 지하철에서 내렸다. 10번 출구 대로변에 있는 허름한 중국집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인근의 간판들에 치여 중국집 간판이 잘 안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나도 중국집을 바로 찾지 못했다. 앞뒤로 두어 번 발길을 한 다음에야 겨우 찾아 들어갔다. 가난한 자를 기꺼이 반겨주는 가난한 중국집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지나갔다. 

젊은 시절, 나는 이곳의 자장면으로 직장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풀었었다. 특히 몸이 아픈 날에는 어김없이 이곳을 찾았다. 이곳의 자장면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내게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이곳 자장면이 제일 맛있어요.”

문을 연 지 45년 되었다는 중국집 노파는 얼마 전에도 공중파 PD가 찾아왔다고 했다. 촬영을 거절하느라 애를 먹었단다. 

“영감이 죽으면 이 집도 없어져요.”

이제는 중국 음식을 힘들게 배우겠다는 사람도 없단다. 직접 음식을 만드는 영감이 죽으면 이 집도 당연히 문을 닫을 거란다.

그렇다면 정말 아쉬운 일이 될 것이다. 내게는 아픔을 달래주고 행복을 만끽하게 해주는 마약(?)이었던 자장면이 사라진다는 것은 ….  

동대문 근처의 자장면과 관련, 아버지와의 기억을 빼놓을 수 없다.

아버지와 처음 서울 나들이를 나섰을 때, 나는 10대 후반의 수척한 아이였다. 키는 180cm에 육박한데 몸무게는 50kg대 후반을 오르내릴 정도로 빈약했다. 

서울 고속버스 정류장은 지금의 강남이 아니라 동대문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대문에 도착한 고속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속을 게워내야만 했다. 나의 허약한 체질은 이를 버티지 못한 것이다. 고속버스로 이동하는 도중에도 속이 울렁거리는 것을 참느라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 나를 잠시 기다렸다가, 아버지는 갈 길을 바삐 재촉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버지가 가던 길을 멈춰섰다.

“이곳에서 자장면을 먹자꾸나.”

아마도 식사시간이 지나서 응암동 친지 집에 도착하는 것이 당신에게는 부담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 토할 정도로 속이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자장면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아무리 속이 뒤집혔다 해도 그렇게 맛있는 자장면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한 그릇 더 먹고 싶었지만 나는 말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다며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섰기 때문이다.

동대문 고속버스 정류장 인근의 허름한 건물 2층 중국집, 그 계단을 오르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나는 당시 자장면 맛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생각건대, 그날의 자장면은 아버지가 내게 사준 처음이자 마지막 자장면이었다. 몇 년 후 내가 군 복무 중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디로 갈 것인가?

자장면 때문인지 기분 탓인지 어깨 통증도 완화됐다. 오랜만에 찾은 동대문의 중국집 자장면으로 행복해진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아버지가 생전에 사준 유일한 자장면에 대한 아련한 기억도 나의 향수를 자극했다. 아직도 입안에 자장면 냄새가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오늘 같은 날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런 날, 바로 우이동 숙소로 돌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밤늦게까지 혜화동 창경궁 정릉을 두루 걸어 다녔다. 통증이 계속 밀려오고 또한 무척 피곤했지만 걷고 걸었다. 나는 걸으면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운수 좋은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