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채기 칼럼] 독재자의 지지율
[뉴스클레임]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이번 대선에서 이재명 후보는 49.42%의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728만 7513표라고 했다. 김문수 후보의 41.15%, 1439만 5639표를 여유 있게 따돌리고 있었다. 이준석 후보는 8.34%, 291만 7523표라고 했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 후 국정 수행에 관한 첫 여론조사 결과, ‘잘할 것’이라는 응답이 58.2%로나타났다고 했다. 득표율 49.42%를 훨씬 상회, 새 대통령에 대한 기대감을 반영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전남 지역에서 89.04%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나타냈고, 이를 어떤 유튜버가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에는 ‘특정 지역’이 아닌 전체 득표율이 ‘물경’ 99.9%에 달했던 대통령도 있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씨가 그랬다.
전 씨는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대통령이 ‘돌연’ 사임한 뒤 11일 만인 8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에 ‘단일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전씨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이었다. 이 선거에서 전 위원장은 2524표를 얻어 99.9%의 득표율을 기록한 것이다. 사실상 ‘만장일치’가 아닐 수 없었다.
이듬해 2월 25일 시행된 대통령 선거는 대통령 선거인단의 간접선거였다. 총선거인 5277명 가운데 5271명이 투표한 선거에서 ‘전두환 후보’는 4755표를 얻어 90.2%의 지지율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경이적인’ 득표율은 더 있었다. 1972년 12월 23일 2359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가운데 2명을 제외한 2357명이 '단독후보‘인 박정희 후보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한 것이다. 2명은 ‘무효표’였다고 했다.
1978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비슷한 득표율이 나왔다. 2578명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는데, 2577명이 지지했고 단 1명만 ‘무효표’를 던졌다고 했다. 역시 ‘만장일치’라고 할 만했다.
심지어는, ‘가축’까지 지지했던 대통령도 있었다.
1956년 5월, 제3대 대통령과 4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승만 후보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받고도 갑자기 ‘불출마’를 선언했다.
“제3대 대통령에는 좀 더 박력 있는 인사가 나와서 국토 통일을 이룩해주기 바란다.”
그러자 재출마를 ‘간청’하는 호소문과 결의문이 잇따랐다. 곳곳에서 시위도 벌어졌다.
“이승만 후보의 3선을 지지한다”는 함성이 온 나라에 울렸다. ‘혈서’를 쓰는 유권자도 적지 않았다. ‘번의(翻意) 촉구’였다.
우마차까지 동원되고 있었다. 이른바 ‘우의마의(牛意馬意)’였다. 소와 말까지 ‘이심전심’으로 ‘이승만 대통령’을 원한 것이다. 이렇게 ‘가축’에게까지 지지를 받는데 ‘불출마’를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이승만은 담화문을 발표했다.
“민의(民意)에 양보하여 종전의 결의를 번복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로 결심한다.”
가축까지 지지했을 정도였으니, 이승만의 지지율은 어쩌면 100%를 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 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의 선거구호가 유명한 “못 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 수 없다”로 응수하고 있었다.
이들 대통령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독재’를 했다는 공통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