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칼럼] 따지고 논쟁하는 이유

2025-07-01     김파란 편집위원
사진=김파란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따지고 논쟁하는 것은 고통을 함께 하기 위해서다.

1. 아버지를 죽인 죄를 함께 하고자 했던 세 형제들

'이제는 너에게 벌레들 이야기를 하고 싶구나, 하느님에게 정욕을 선사받은 저놈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주인공 첫째 아들 드미트리의 고백이다. 드미트리 고백대로 인간은 다 벌레들이다. 드미트리도 벌레고 알료사도 벌레다. 동물적인 욕정은 다 갖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살아있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삶에 대한 욕망은 성욕이건 생존욕이건 그런 걸 다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만 규정되지 않는 존재가 인간들이다. 

숭고함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를 더 높이 끌어올리는 욕망과 타락에 이끌리는 성향이 한 인물 속에 공존한다. 이것을 토스토예프스키는 주인공 드미트리의 입을 통해 이렇게 탄식한다.

"아름다움이란 정말! 덧붙여 내가 참을 수 없는 건 어떤 사람이, 그것도 고귀한 마음과 드높은 이성을 가진 사람이 마돈나의 이상에서 시작하여 소돔의 이상으로 끝을 맺는다는 거야(.....) 아니야, 인간이란 넓어, 너무도 넓어, 나는 차라리 축소시켰으면 싶어, 젠장 도대체 뭐가 뭔지 알게 뭐람, 정말! 이성에겐 치욕으로 여겨지는 것이 마음에겐 완전히 아름다움이니 말이다…" 1편 227쪽

이게 작가의 문제의식이다. 인간은 수수께기라는 것. 그리고 인간 마음이라는 것은 소돔의 이상과 마돈나의 이상이 투쟁하는 전쟁터라는 것.

그리고 독자들도 이런 작가들과 작품을 두고 끊임없이 논쟁한다.

왜 그 글이 좋으냐고, 왜 그 그림이 좋으냐고, 왜 그 음악이 좋으냐고, 묻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까. 그냥 좋으면 좋은거고, 싫으면 싫은 거다. 취미 또는 취향의 판단은 대부분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따지고 서로 논쟁한다.

왜 일까?

나는 이것을 아름다움과 함께 고통을 나눠가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타인의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나와 타인의 입장을 바꿔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외는 없다. 아름다움은 취향, 취미와 관련 된다. 취향, 취미 판단은 서로 공감의 영역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서로 주고 받을 수 없다.

즉 정치적 판단, 취미판단은 정체성을 확실히 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사람과 사람 사이에 공감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아름다움'은 범위가 상당히 넓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숭고미'도 있고 정반대의 '퇴폐미'도 다 아름다움의 범주에 들어간다. 쓰레기장을 찍어 놓은 사진을 보고도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처럼 독특한 것이 아름다움이다. 반면 '선' 이라는 것은 좁은 문의 세계다. '선'이라는 가치 이념을 생각하면 사람들은 자꾸 좁히게 된다. 반면 좁은 선의 범위와는 달리 '미'의 영역은 넓고 확장되는 것이다. 이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이다. 톨스토이가 선의 이념에서 바람직한 삶을 구상했다면 도스토예프스키는 미적인 영역에서 가능성을 찾았던 작가다.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드미트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내부에는 너도 나도 이런 벌레가 살고 있어서 핏속에 폭풍을 일으키는 거야. 폭풍이고 말고. 정욕은 폭풍이니까. 폭풍보다도 더하지.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거야. 그게 무서운 것은 미에는 정의가 없고 정의를 내릴 수 없기 때문이지"

왜 아름다움은 정의가 불가능할까? 경계가 불확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런 경계가 불확정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인간에게 어떻게 일어나느냐? 또는  미학에 대한 철학이 왜 중요하냐? 는 이것이 미학에 대한 판단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체성으로 확정되지 않는 것들의 영역들을 인간이 어떻게 그 사이를 더듬어 가며, 또 인간의 정신이 판단해 가느냐를 따져 물어, 서로 어떻게 합의해 가는 지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2.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 만인은 만인에게 책임이 있다.

: 러시아 민중종교와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미국 대통령 조시 부시가 2003년 러시아를 방문해서 푸틴을 만날 때 실제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첫 마디가 "나 당신 만나러 러시아 온다고 해서 오는 비행기에서 '죄와 벌' 열심히 읽었다."고 얘기했다. 무슨 의미일까? 그냥 푸틴 기분 좋으라고 그랬을까? 조시 부시라고 하는 역사상 가장 무식한 대통령도 러시아를 가고, 그 러시아 지도자를 만날 때는 문학으로부터 얘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러시아를 이해하는 첫 단추는 '문학'이라는 것을 말이다.

러시아인을 러시아인으로 만들어주는 즉 나는 '러시아인'이다 또는 '우리는 러시아인이다, 러시아에 산다.'라는 것을 확인 시켜주는 것이 두 가지다. '러시아 정교'와 '문학'이다. 러시아 사람들은 러시아 문학을 읽으면서 그래 '난 러시아인'이야 라고 자기가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확인시켰다. 그들은 똑같은 푸른 눈동자, 흰피부, 금방 같은 전형적인 러시아인 모습이 아닌 러시아 땅에 있으면서 러시아 문학을 읽고, 러시아 문학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그 누구라도 사실 러시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서를 알기에 저 무식한 조시 부시도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다고 러시아 땅에 첫 발을 내리는 그 순간 말한 것이다.

이런 러시아 문학은 러시아정교 = 동방정교를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 가장 불행한 작가 '고골'도 이 종교 때문에 죽었다. 결혼도 안 하고 자식도 없었던 고골. 오로지 창작에 일생을 바쳤지만 말년을 불우하게 맞은 작가, 자신의 소설이 러시아 민중을 위한 종교적인 긍정적인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고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반미치광이 상태가 되어 생을 마친 작가가 고골이다. 그럼 이 러시아 정교란 무엇인가와 이 러시아 정교의 또 다른 갈래인 민중종교는 뭘까?

기독교는 로마 카톨릭이 먼저 있었고 이 카톨릭이 6세기경 동방정교로 갈라져 나간다. 그 이후에 15세기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개신교가 생긴다. 이 세 개를 합쳐서 기독교라 말한다. 러시아 정교는 동방정교로부터 옮겨간 것이다. 이때 키릴문자도 같이 온다(이건 또 나중에 자세히). 러시아에는 이 정교회도 있었고 민중종교도 발달해 있었다. 물론 민족신앙 안에서 예수의 말씀이 있다. 즉 성서의 말씀을 그대로 믿는 신앙이다. 우리는 화려하고 큰 러시아 성당만을 알고 있지만 러시아 민중 속으로 들어가보면 집집마다 소박한 믿음을 지키며 살고 있다. 어쨌든 이 민중종교도 성서를 믿는 사람들이다. 이 민중종교와 러시아정교회를 큰 갈래로 비교하자면 러시아정교회는 국가 종교였고  이 국가 종교는 있는 자들 귀족들이 가는 곳이었다. 

농노로 사는 농민들의 신앙은 민중종교에 있었다. 이들의 종교 속에는 '대지 = 땅' 에 대한 신앙이 있었다. 러시아 민중은 땅을 통해 복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또 수 많은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을 보면 '땅'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 나온다. 땅에서 복이 온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1917년 혁명을 성공한 레닌도 이런 러시아 민중의 '땅'에 대한 정서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즉 레닌은 아래로부터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혁명이 성공하고 이 아래로부터의 통합은 '농민'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봤다.

우리가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라고 말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러시아 문학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다. 이런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름다움만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러시아인들의 신앙 '대지'를 말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알료샤의 입을 통해 <대지의 신>은 이런 가망 없는 민중, 가장 약한 자들의 신이다. 가장 척박한 땅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버림받은 자들이 살아가는 작은 신의 나라를 알료샤의 입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카라마조프 가 형제들>에 대한 평으로 변신론자 도스토예프스키가 무신론의 도전에 직면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평이 있다. 20세기 초 영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로렌스가 그렇게 생각했다. 로렌스는 병든 현대문명을 고발하고자 했던 작가다. 평생 허약한 몸과 폐렴으로 고통 받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로렌스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주인공은 이반 카라마조프(둘째)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이 이반 카라마조프의 무신론을 러시아 정신으로(조시마 신부) 넘어서려고 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반을 넘어서지 못했다고 평했다. 

그럼 여기서 내가 읽은 '카라마조프'를 말해보려 한다. 로렌스가 말한 이반의 사상은 1부5편 <대심문관>편 이라는 장에서 그려진다. 둘째인 이반이 동생인 알료샤에게 '대심문관의 전설'을 들려 주는데 이 부분에 무신론의 핵심이 담겨 있다. 여기에 대해 도스토예프스키는 가장 러시아적인 정신으로 반박을 한다. 로렌스는 여기서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다. 즉 로렌스는 러시아 정신을 대표하는 조시마 신부가 이반의 무신론을 반박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런 면도 있다. 그 당시 잡지에 연재될 때도 독자들 반응도 로렌스 평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읽었을 때도 '대심문관' 편은 입이 딱 벌어졌다. 그러나 그 뒤에 이어서 나온 조시마 신부의 '러시아 수도승' 이라는 편을 읽으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실패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러시아 수도사>편에는 조시마 장로의 자전적 이야기가 들어 있다. 어렸을 때 일로 자신의 형이 18세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죽는다. 죽기 전 형이 병상에서 일어나서는 하인들에게 얘기한다.

- 사랑스러운 여러분, 소중한 여러분, 무엇 때문에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겁니까, 내게 이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라도 있겠습니까?

이건 "여러분, 제게 무슨 자격이 있어서 저한테 잘해주십니까? 제가 봉사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다' 또는 '만인은 만인에게 책임이 있다' 

이게 <러시아 수도승>에서 조시마 장로가 말하는 핵심 사상이다. 그때 유럽의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불합리하고 억울할 수도 있다. 서구식 개인주의는 '만인은 만인에게 이리다(토마스 홉스)' 생각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론의 기본 사상이다. 그래서 국가라는 괴물을 만들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각자에게 이리 같은 존재이기에 자연 상태는 지옥이기 때문에 각자의 권리를 조금씩 양도해서 국가라는 괴물을 만들어 거기에 복속되는 것이다. 즉 요즘 유행하는 차악의 개념이다. 자연 상태의 지옥에 대한 차악. 

그런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의식과 책임의 공동체를 차악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그렇게 읽으니 로렌스가 실패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정신은 결코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실패 할 줄 알면서도 그것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는 신념에서 나왔다는 생각을 들었다.

만인은 만인에게 죄인이니만큼 그 모든 지옥은 우리 모두에게 다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럼 누군가는 또 내게 물을 것이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면 아무 경중도 없이 전체를 n분의 1로 나눠 가지는 것이냐? 그건 서구식이다. 우리는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책임이 크다는 게 도스토예프스키식 즉 러시아식 사상인 것이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처럼 서로 싸우고 상처를 주면서도 함께 하려고 하는 것, 또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음에도 그 죄를 함께 하려는 세 형제들.....죄는 결코 그  크기가 아니라 죄를 느끼는 인간의 마지막 구원같은(양파 한 줄기)도덕적 양심에 의해 드러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