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칼럼] 한강의 '여수의 사랑'

2025-07-11     김파란 편집위원
사진=김파란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밤바다 앞에 호젖이 앉아 술을 마시 듯 여수라는 지명을 삼키면, 자욱한 유년의 기억이 안개처럼 떠오른다. 나의 친조부는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팔도를 떠돌던 장돌림이었다. 조부는 전라도 벌교에서 조씨 성을 가진 조모를 만나 그곳에서 몸과 마음을 푸시고 사셨다. 그런 조부가 부산으로 귀향 하신게 언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직도 나의 입에 남아 있는 조모의 말투, 음식, 넋두리 한 조각 한 조각이 가보지 못한 그곳, 그러니까 내 아버지 태생지가 그리운 건 아버지와 내 상처가 서로 연결된 때문이 아닐까.

소설가 한강의 1995년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읽었을 때 내가 받은 느낌은 젊은 작가의 패기나 젊음의 박진감보다는 이미 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알아버린 조숙한 인간의 고뇌가 책을 덮고 있었다. 

나와 같이 가족, 사람과의 사랑을 잃고 쓰는 절망의 전주곡 같았다.

한강의 절망은 가족의 비극적 해체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어머니 혹 아버지의 죽거나 아니면 형이나 동생이 제정신이 아니거나 가족들 중의 누구 하나가 실종되는 파탄을 보여준다. '여수의 사랑'에서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 여동생의 죽음, 첫장편 <검은사슴>에서는 연인의 비극적인 가족사가, <붉은 닻>에서는 아버지의 부재와 같은 식으로 한강은 가족을 비극적으로 해체시켜내면서 절망의 상황을 표현한다.

이렇게 한강이 젊은 작가 시절부터 집요하게 가족을 헤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가족이 헤체되면 존재는 고아 상태가 된다. 한강이 묘사하는 가족의 해체는  탈현대주의에서 말하는 가족 해체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조장되는, 가족 성원들간의 의사 소통의 단절과는 다른,  가족 그 자체의 비극적 정황을 밑그림으로  그것을 통해 삭막한 이 세상에 홀로 남게 된 존재의 아득한 절망감에 대한 집중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작가는 고아를 메개로 하여 삶의 결손 상황을 그리고, 그 고아에게 세상은 절망스러운 것이며, 이 절망은 회피할 수 없다는 비극적 세계관을 그려내고 있다.

한강은 개인(자기)의 생을 의미가 충만한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이에 한강은 우리 사회가 누구나 합의할 만한 삶의 가치를 가지고 있고, 이에 편입하려는 노력은 행복한 체험이 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사회의 정황이, 아니 삶을 둘러싼 모든 정황이, 아니 삶 자체가 너무도 허망한 것이다. 한강은 이 허망함을 사회에 대한 어떤 전망도 부재한 시대의 고아로 이해하며 그것을 가족의 해체로 표현해 내면서 독자들에게 반문한다.

'당신들은 행복한가?' 라고. 그러면서 작가는 '나는 행복하지 않다'며 이 세기말을 '상처 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는' 여수의 바다로 돌아간다.

그 바다의 한가운데서 한강은 소설을 쓰는 것이다.

한강의 소설 중에서 비극적 세계관이 가장 큰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은 1995년 내놓은 '여수의 사랑'이다. 여수는 전라도의 지명인데 그 말의 울림이 참 묘하다.

"여수, 그 앞바다의 녹쓴 철선들은 지금도 상처입은 목소리로 울부짖어대고 있을 것이다.  여수 만의 서늘한 해류는 멍든 속살 같은 푸릇푸릇한 섬들과 몸 섞으며 굽이돌고 있을 것이다. 저무는 선착장마다 주황빛 알 전구들이 밝혀질 것이다. 찝찝한 바닷바람은 격렬하게 우산을 까뒤집고 여자들의 치마를,  머리카락을 허공으로 솟구치게 할 것이다"

소설의 도입 부분이다. 여수를 울부짓는 청각의 효과로, 주황빛 알전구나 붉은 노을과 같은 시각적인 효과로 형상화 하는 작가의 만만치 않은 필력으로 도입부부터 압권을 이룬다.

그럼 이 여수는 어떻다는 것인가? 

줄거리를 간단히 요약해보면 나(주인공)의 고향은 여수이다. 어머니는 죽었다. 나의 아버지는 나의 동생을 죽였고 나도 죽이려 했다. 나만 살아 남았다. 나는 고향을 떠나 산다. 그러니까 여수는 고향이자 원수같은 동네이다. 어머니가, 여동생이, 아버지가 다 죽은 저주의 고향, 저주의 바다로 기억된다. 여수를 떠난 주인공은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더럽다는 심한 결백증에 빠진다. 틈만나면 손을 씻거나 방을 청소한다. 그런 심리적 갈등은 또 하나의 상처받은 인물 자흔의 등장으로 더욱 심화된다. 자흔은 나의 영상과도 같은 존재다. 서로를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둘은 서로 간직한 깊은 상처를 자각하게 된다. 결국 나는 사람의 삶이란 상처의 자리로 돌아가 보아서 그 상처를 다시 대면하는 것이라는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나는 여수행 기차에 몸을 싣는다.

가족의 비극적 해체를 통해 고아상태의 자아를 환기시키려 한다. 근복적 자기를 시대의 고아로 이해하며 과연 우리는 행복한가 반문하는 것이다.

 '여수의 사랑' 여수는 발음해 보는 순간 원수로 달리 발음되기도 하고 나그네의 지친 심회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