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파란 칼럼] 장마와 도스토예프스키
[뉴스클레임]
아침 일찍 잡풀을 뽑고, 쓰러진 고추대 세우고 어머니 밥상에 낼 오이와 가지 그리고 여린 고추를 따서 들어왔다. 어머니는 고추와 가지를 쪄서 무치고 오이 채썰어 냉국만 만들어 주면 여름에 다른 반찬은 필요 없다고 하신다. 밭에서 돌아와 씻고 바로 반찬 장만하고 쇼파에 앉으니 비가 내린다. 장마철에 내가 누릴 수 있는 호사는 잠깐 잠깐 밭일을 하면 환한 대낮에도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시간 날 때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마지막 장부터 거꾸로 읽어가고 있다.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점은 한 번 읽고 나면, 총4부 12편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을 쪼개서 어느 편을 먼저 읽어도 상관 없다는 것이다.
아니 더 흥미롭다.
특히 드미트리의 재판을 기술하는 데 바친 마지막 12편 <오심>은 그 당시 사법제도를 이해하는데 톨스토이의 <부활>과 함께 중요한 역사적 자료이기도 하다. 사실 혁명 전 러시아사법 체제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현대 러시사에서 두 소설이 역사적으로 현재와 과거를 잇는 귀중한 기억의 가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러시아 혁명인 1917년만을 알고 있지만 그 전 1861년 러시아 후진성의 상징이었던 농노제 철폐를 시작으로 1864년 사법개혁이 뒤따랐다. 1861년 시행된 농노제 철폐에 대해 선 러시아 혁명사를 쓰면서 몇 번 언급했지만 토지개혁과 같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 말그대로 농부를 노예라는 신분에서만 해방시킨 것이다. 농부에게 먹고 살 땅은 주지 않고 신분만 해방 시켰으니 농부들의 삶은 귀족의 노예로 살던 때 보다 더 고통스러워졌다. 귀족의 노예로 살이가던 때에는 죽어라 일만 하면서 귀족의 소유물로서 인간 취급은 받지 못했지만 밥은 먹여 줬다. 하지만 땅을 소유하지 못하고 해방된 농부와 그 가족들은 굶어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864년 이루어진 사법 개혁의 가장 큰 의미는 러시아 인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농민이 재판의 혜택을 받게 되었는 것이다. 이전의 러시아 재판에서 농노는 제외되었다. 농노란 말그대로 농부이자 노에로서 귀족의 말과 가축처럼 귀족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러시아의 가장 부끄러운 제도로 농노제를 거론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1864년 도입된 새로운 사법제도는 근대화와 민주화를 상징으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부활>에서는 1864년 도입된 새로운 사법제도로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그 당시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을 그대로 직접 인용하듯 옮기고 있고, 톨스토이 <부활>에서는 사법 개혁에서 눈에 띈 배심원 제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
또 이 두 소설의 공통점은 그 당시 러시아의 저명한 법조인 코니와 교류하면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에필로그를 제외한 마지막 편 전체가 재판 서술로 채워지고 있으며그 분량도 (믿음사편으로 311쪽에서 501쪽) 전체 12편 중 가장 길다.
사실 이 소설을 읽은 사람은 다 알겠지만 재판에서 다뤄지는 내용 중 독자를 놀라게 할 반전은 없다. 검사와 변호사가 말하는 모든 정황들은 이미 소설 전반에 다 밝혀진 내용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진범 스메르댜코프와의 대화도 11편에 이미 다 나왔다. 12편의 제목이 <오심>인 것은 부친 살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소설의 막판에 어떤 반전이 있었다라는 것이 아니라, 소설을 읽어가던 독자들은 이미 다 아는 진실, 즉 장남 드미트리가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가 아니라는 진실이 법정으로 갔을 때 사법개혁으로 바뀐 법으로 진실이 부정되고 그에 따라 무고한 인물이 살인자가 된다는 반전에 있다.
사법 개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배심원 제도의 도입이었다. 더블어 검사와 변호사의 논고와 변론을 하고 그를 들은 배심원이 평결하는 선진적인 유럽의 법 제도를 러시아에서 그대로 도입한 것이다. 이 제도에 따라 재판하는 과정에서 제도의 중심에 있는 똑똑한 율사(검사와 변호사)들에 의해 진실이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너무도 적날하게 보여주는 것이 12편 <오심>의 새로움이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지고 있었던 사법개혁의 문제 의식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사법 개혁이 시행된 초기에는 개혁된 사법 제도에 호의적이었으나 법조인 코니의 영향으로 재판들을 직접 참관하고 관찰하면서 점차 실망하게 되고 나중에는 개탄스러워했다. 재판이 무고한 민중을 구제하는 신성한 과정이 아니라 법조인들의 언변을 대결하는 무대가 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배심원 제도하에서 법조인들은 진실을 찾아 정의를 구현하기보다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 배심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더 큰 노력을 기울이는 현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법이 어떻게 정의(진실)을 외면하는가를 카라마조프 가족이 빚어내는 비극의 클라이막스이자 파국의 종착점인 법정 장면을 통해 파격적으로 그려냈다. 아버지는 살해당하고, 큰아들은 살인 누명을 쓴다. 둘째 아들은 심한 가책으로 정신 분열증에 걸리고, 살인범 서자는 자살하고, 셋째 아들은 마을을 떠난다.
이렇게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는 무슨 약속이라도 한 듯 자신들의 마지막 장편에서 법과 정의의 문제를 다뤘다. 그것도 주인공이 부친 살해의 누명을 뒤집어쓴 채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고(카라마조프카의 형제들의 드미트리), 여주인공은 고객을 독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시베리아 유형(부활의 카튜샤)을 가게 된다는 설정으로 재판의 오심을 다루면서 사법 제도의 불합리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법과 정의의 문제는 전혀 새롭지 않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죄와 벌>에서 이미 죄는 무엇이고 벌은 무엇인지를 탐구했고, 도스토예프스키가 가장 힘들게 완성했던 <백치>에서도 여주인공을 살해한 로고진이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 받는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마지막 작품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는 부친 살해라는 자극적인 소재로 다시 죄와 벌의 문제를 정신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이것이 현실의 제도와 만났을 때 죄를 판단하고 벌하는 정의는 과연 어떻게 실현되느냐의 문제를 작가가 얼마나 고민했느냐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정한 재판은 사법 제도가 정한 테두리 바깥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