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 한미 관세 협상, 자동차 내주고 전략산업 지킨 ‘현실적 승부’

끝까지 방어한 농식품 시장, 조선과 반도체 등 전략 투자로 균형 맞춰 

2025-07-31     박명규 김도희 기자
미·한 관세 협상, ‘선방’인가 ‘새 질서’인가…그 구조와 여파 분석. 뉴스클레임 DB

한미 관세 협상이 타결됐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예고한 25% ‘보복 관세’는 막판에 15%로 낮춰졌다. 한국은 이를 대가로 조선업, 반도체, 원자력, 2차 전지 등 분야에 3500억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내놨다. 자동차 관세는 FTA 체결 이후 유지해온 0%에서 15%로 인상됐지만, 쌀과 소고기 등 민감 품목은 지켜냈다. 차관회의에서 고성이 오갔고 대통령이 직접 조율한 이번 협상은 단순한 수출입 이슈를 넘어 외교, 안보, 산업 전략의 교차점에 서 있다.

이번 협상의 구조를 보면 ‘관세 인상’이라는 부담을 감수하고, ‘전략 산업 중심의 투자 구조’를 창출한 교환형 모델이다. 특히 리스크를 민간으로 최대한 분산시킨 점이 돋보인다. 조선업 협력 펀드로 1500억달러가 책정됐고, 나머지 2000억달러는 반도체·바이오 등 첨단산업 투자에 배분된다. 정부의 실질적 직접투자액은 전체의 5% 수준으로, 대부분이 보증과 대출 형태의 간접 지원이다.

이와 별도로 1000억달러 규모의 에너지 수입 계약도 체결됐다. 하지만 이 역시 중동산 원유와 LNG를 미국산으로 일부 전환하는 수준이며, 연평균 수입 규모 대비 큰 부담은 아니다.

문제는 자동차다. 기존 0%였던 대미 수출차에 대해 15% 관세가 부과되며, 이는 2.5%에서 오른 일본이나 10%였던 EU보다 인상폭이 크다. 현대차와 기아는 단기적으로 가격 경쟁력 면에서 불리해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끝까지 12.5%를 주장했지만 트럼프가 ‘모두 15%’라고 못을 박았다”는 협상단 설명도 있다. 가격 조정과 마케팅 전략 재조정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그럼에도 이 협상이 ‘선방’이었다는 평가가 가능한 배경에는 철저한 사전 분석과 리스크 관리가 있다. 한국 협상팀은 일본과 EU의 협상 구조를 면밀히 분석해 ‘리버스 엔지니어링’ 방식으로 대응했다. 미국이 기존에 요구한 4000억달러 투자 요구도 3500억달러 수준으로 조정됐다. 협상 초반 1000억달러를 제안했지만, 트럼프 행정부의 정치 일정 등도 협상 지렛대가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의 구매보증 약속과 ‘리스크 프리 구조’는 실질적 부담의 상당 부분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데이터 주권 문제로 거론됐던 구글 지도 반출은 협상에서 제외됐고, 민감한 농산물 시장 역시 개방을 막았다. 고위 관료들은 “끝까지 지킬 건 지켰다”는 표현을 썼고, 대통령실 역시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라고 평가했다. 협상이 이뤄진 날 트럼프가 “완전하고 포괄적인 합의”라며 직접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 또한 정치적 안정성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다만, 이번 협상을 통해 확인된 것은 한미 FTA 체제의 근본적 변화다. 한때 자유무역의 상징이던 FTA가 실질적으로 힘의 논리에 재편되는 형국이다. 양국은 ‘상호 관세’와 ‘조건부 투자’라는 새 통상 패러다임에 접어들었고, 이는 향후 철강·반도체 등 다른 통상 이슈에도 유사한 접근 방식이 적용될 가능성을 예고한다.

미국 상무부는 “90%의 이익은 미국이 가져간다”고 언급했지만, 이는 펀드 구조의 특성상 수익이 다시 미국에 재투자되는 금융 시스템의 논리다. 한국은 직접 자금 투입을 최소화하면서 미국 공급망에 깊숙이 들어가는 효과를 얻었고, 정치적으로는 정권 초 최대 외교·경제 리스크를 통제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협상이 보여준 것은 단순한 '관세 방어' 이상의 의미다. FTA의 시대가 저무는 자리에 새로운 통상 질서가 들어서고 있으며, 기존 제도에 의존해온 기업과 정부 모두 더 능동적이고 전략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국면이다. 이번 사례는 바로 그 새로운 시대의 프로토타입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