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인천 아암도서 의문사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이야기①

2025-11-24     최인기 빈민운동가
1996년 이덕인 열사의 영결식 장면. 사진=이덕인 대책위

[뉴스클레임]

오는 27일은 이덕인 열사의 30주기 기일이다. 추모한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을 넘어, 그가 지키고자 했던 가치를 되새기며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30년 동안 사람들은 어김없이 한자리에 모여 매년 이날을 기린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95년 6월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지방선거에서 자치단체들은 노점상 문제를 둘러싸고 도시 미관 개선, 통행 불편 등을 이유로 곳곳에서 단속과 정비를 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서초구에서 노점상을 하다 장애인 최정환 씨가 분신을 한 사건이 있었고 그를 기리면서, 추모제를 치르던 사람들은 자신의 생계를 위해 ‘장애인 자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덕인도 그중 한사람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였던 그는 인천의 아암도 지부 ‘장자추’에 합류해 간부로 활동하며 8월에는 통일 대회에 그리고 인천에서 가까운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에 적극 결합하며 틈틈이 노점상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하지만 인천시와 연수구는 2억2400만원의 예산을 들여 철거 비리와 폭력으로 악명을 떨치던 ‘무창용역’업체를 고용했다. 마침내 11월 24일 진눈깨비가 해변가에 내리던 날 대대적인 철거와 단속이 강행된다. 노점상과 장애인들은 급히 망루에 올라가 피신하고 항의했다. 

경찰들과 구름처럼 몰려든 용역들은 인근 도로를 완전히 봉쇄하고 망루에 물과 소화기를 뿌려댔다 굴착기로 위협하며 농성자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노점상과 장애인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25일, 음식을 구하러 간 이덕인은 실종된 채 되돌아오지 못했다. 사흘 뒤 28일 바닷가에서 변사체 떠오른다. 상의가 벗겨진 채 양손이 뒤로 포박되고 밧줄에 묶여있었다. 군데군데 피멍이 들어 타살로 의심할 정황이 많았다. 경찰은 시신이 안치된 인천 길병원 영안실 콘크리트 벽을 망치로 뚫고 들어와 탈취했다. 부검이 이뤄졌고, 사인은 ‘익사’로 발표됐다. 사건을 서둘러 종료했다. 

1995년 서울 종묘공원에서 개최된 이덕인 열사 추모집회. 사진=이덕인 대책위

이 과정에서 영안실을 지키던 인하대 학생을 비롯해 노점상, 장애인 등이 큰 상처를 입고 구속되었다. 당시 인하대 총학생회 관계자의 진술에 의하면, “이덕인 의문사 사건을 알고 연대 자로서 달려갔지만, 시신 탈취를 위해 병원 영안실을 침탈한 공권력과 정권의 폭력적 대응을 경험했으며, 이후 이덕인 열사 장례 투쟁은 반민주적 국가 폭력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라고 말한다. 한겨울에 시작된 저항은 다음 해 봄이 오는 1996년 4월까지 이어져 장례식을 치룬다. 그 후로 유가족은 죽음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동분서주 곳곳을 찾아다니고 헤매게 된다. 

세월이 흘러 2002년 김대중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천만다행으로 ‘이덕인 열사가 공권력에 의한 위법한 행사로 사망했다’라고 인정했다. 구체적으로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보상 심의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고 했다. 이후 ‘민주화운동 관련 명예 회복이나 배·보상 심의’ 신청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이 사건은 기각됐다. “위법한 노점 활동에 대한 적법한 행정절차”이며 “노점 단속은 지자체의 고유 사무 행정”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동료들은 황당했고, 가족들은 좌절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의 이야기다. 그리고 또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변사체로 발견된 노점상 장애인 이덕인. 사진=이덕인 대책위

이덕인열사 의문사 진실 규명 및 명예 회복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따르면 “노점 단속이 지자체의 고유 사무 행정이라 말하지만, 아암도 일대 도시개발과 도시 정비 과정은 인천시 연수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라고 말한다. 행정대집행과 예산 결의를 공동으로 결정한 인천시의 행정절차는 물론 당시 김영삼 정부의 노점 단속 지침 등이 선행되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용역을 동원한 ‘행정대집행’은, 군, 경, 소방 당국 등 제반 공권력의 합동 방식으로 중앙정부-시-구의 행정 방향과 종합적인 조사가 필요하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1995년 인천아암도에서 벌어진 노점상 철거 장면. 사진=이덕인 대책위 

이렇게 우리 사회 ‘국가 폭력’으로 희생된 피해 생존자와 유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실을 밝히고자 간절한 열망으로 모였다. 그리고 사회 각계각층 노력의 결실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개정됨에 따라 2009년, 1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가 만들어졌다. 다행히 ‘이덕인 사건에 대해서도 위법한 공권력으로 인한 사망인지에 대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가족과 동료들은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뚜렷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중단된다.

그러는 사이 부모들은 나이가 들고 점차 건강도 악화하기 시작했다. 세월이 흘러 다시 국회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을 통과시켰고, 2기 위원회가 2020년에 12월 다시 출범했다. 당시 정근식 과거사 정리 위원장은 면담 자리에서 “선결 과제로 조사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 자리에 유가족 이기주 아버님과 공동대책위 노점상, 장애인 대표 등이 참석했다. 모두 진상규명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진실화해위는 조사 개시 여부를 신청인에게 90일 이내에 통보해야 함에도 8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조사 개시가 이루어지리라 기대하던 유가족과 단체들은 기다림에 지쳐갔다. 위원회의 역량이나 여건이 문제라면 시민사회가 함께 발 벗고 나서겠다고도 했지만, 결과는 ‘묵묵부답’이었다.

오는 27일 추모제가 오후 2시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다. 이날의 소식과 함께 이야기가 한 번 더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