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연기사 마지막 거인, 배우 이순재 91년 여정 마무리

원로 배우 이순재 별세… 향년 91세

2025-11-25     차현정 기자
배우 이순재. 사진=파크컴퍼니

[뉴스클레임]

대한민국 연기계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렸던 배우 이순재가 25일 새벽 91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한 세기 가까이 질주해온 열정의 무대, 끝까지 현역을 지켜온 거장의 여정이 조용히 멈춰 섰습니다. 

1934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난 이순재는 네 살 때 조부모를 따라 서울로 내려와 서울고,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한 뒤 1965년 TBC 1기 전속 배우가 되면서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 연극을 넘나들며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습니다.

그는 드라마 약 310편, 130편이 넘는 영화, 60편 안팎의 연극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 달에 3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을 만큼 쉼 없이 카메라 앞과 무대를 오갔습니다.작품의 비중보다 완성도를 우선순위에 두는 선택으로 '영원한 현역'이라는 별칭을 얻었습니다.

대중에게는 1991년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의 가부장적 ‘대발이 아버지’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후 ‘허준’의 스승 유의태, ‘목욕탕집 남자들’과 ‘이산’ 등에서 묵직한 연기를 펼치며 국민적 신뢰를 얻었고,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과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는 코믹함과 인간미를 드러낸 ‘야동순재’ 캐릭터로 또 한 번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예능에서도 존재감은 이어졌습니다. tvN ‘꽃보다 할배’에 출연해 거침없는 발걸음과 호기심 많은 태도로 ‘직진 순재’라는 별명을 얻으며 젊은 세대와도 호흡했습니다. 나이를 잊은 체력과 열정으로 여행길을 누비는 모습은 ‘참어른’의 이미지와 겹치며 큰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연극 무대는 이순재에게 평생의 귀향지였습니다. ‘세일즈맨의 죽음’, ‘늙은 부부의 이야기’, ‘장수상회’, ‘앙리 할아버지와 나’, ‘리어왕’, ‘고도를 기다리며’ 등에서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무대를 지켰습니다. 특히 2021년 ‘리어왕’에서는 200분이 넘는 공연을 단일 캐스트로 소화해 연극계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후반기에는 연출과 교육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2023년에는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희곡 ‘갈매기’를 후배들과 대극장 무대에 올리며 첫 연출에 도전했고,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로 강단에 서며 차세대 연기자 양성에 매진했습니다.

정치권에서도 짧지만 굵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1992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자유당 후보로 서울 중랑갑에 출마해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했고, 이후 민자당 부대변인과 한일의원연맹 간사 등 역할을 맡아 의정 활동을 병행했습니다.

연기 인생 말년까지도 그의 열정은 식지 않았습니다.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와 KBS2 드라마 ‘개소리’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고, 지난해 KBS 연기대상에서 ‘개소리’로 대상을 수상하며 KBS 연기대상 역대 최고령 수상자가 됐습니다.

지난해 10월 건강이 악화해 출연 중이던 공연을 중도 하차하고 각종 시상식 참석도 취소하면서 건강 이상이 알려졌습니다. 올해 들어 대외 활동을 사실상 중단한 뒤, 병원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생전 이순재는 “예술은 영원한 미완성”이라는 신념을 강조하며 완벽함보다 끊임없는 도전을 자신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숨이 붙어 있는 한 무대와 카메라를 떠나지 않겠다고 말해온 그의 태도는 동료와 후배, 시청자에게 “연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남긴 채 한국 연기사의 한 장을 깊게 새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