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모 칼럼] 차이콥스키 영혼의 후원자 폰 맥 부인, 절교한 사연
14년간 1200통의 편지와 미지의 단절…세기의 후원이 남긴 영혼의 예술 우정
[뉴스클레임]
사람보다 음악을 더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차이콥스키의 연주를 들은 그여자는 차이콥스키의 천재를 확신한 나머지, 그가 오로지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연간 6000루블의 연금을 줬다. 러시아 부호의 미망인 나대시다 폰 맥부인의 이야기다.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고흐의 작품들이 인류유산으로 남겨질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폰 맥 부인 또한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세상에 선물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빈센트와 테오가 650여통의 편지를 주고 받은 것처럼, 차이콥스키와 폰 맥부인은 14년동안 1204통의 편지를 주고 받는 영혼의 친구가 됐다. 그럼에도 연금을 주는 조건중 하나는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 만나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그들은 그 약속을 지켰다.
만나서는 안 된다고 못박은 이유는 아마도 폰 맥부인이 지극하게 내성적이었던 까닭으로 추정되지만, 만나지는 않는 대신 두 사람은 서로 가까운 곳이 머무는 것을 즐겼다. 폰 맥부인은 자신이 저택을 비우는 동안 차이콥스키가 와서 지내도록 했다. 그가 그녀의 공간에 자신의 숨결을 남기고 갈 수 있도록 했고, 유럽여행을 갈 때도 같은 기간에 같은 곳으로 떠나서는, 서로의 동선이 서로 만나지 않도록 숨바꼭질을 하기도 했다.
서구의 예술이 그처럼 꽃필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폰 맥부인과 같은 후원자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폰 맥부인이 1890년에 갑자기 연금지원과 서신교환을 중단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그동안 차이콥스키는 너무 유명해져서 연금이 중단돼도 경제적인 문제는 없었지만 그녀의 절교선언은 차이콥스키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갑오경장이 벌어지던 1894년, 차이콥스키가 결핵으로 죽은 몇달 뒤, 폰 맥부인도 숨을 거뒀다. 그런데 그들은 왜 절교를 했을까? 폰 맥부인은 경제적인 여건이 나빠져서’ 라고 편지에 썼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 아마도 폰 맥부인의 가족들이 거액의 연금이 무한히 지출되는 것을 싫어했을 거라는 추측이 설득력이 있다. 연금을 중단하지 않으면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폭로하겠다고 폰 맥부인을 압박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