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클레임]
천천히 해저터널을 절반쯤 걸었을 때 벽에 다양한 화보가 보였다. 조금은 우중충한 바다 아래의 시멘트 구조물 터널에서 그나마 환하게 불 밝힌 화보가 있으니 이 길이 조금은 덜 지루하게 보인다.
이렇다 할 건설장비 없던 시절 바다 물막이, 흙을 파내기 등 해저터널 공사가 오로지 사람의 힘만으로 이뤄졌음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시멘트벽에서 조상들의 땀 냄새가 나는 듯했다.
여기엔 통영에 와서 가봐야 할 주요 관광지는 물론 즐길 거리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김상옥, 윤이상, 전혁림 등 통영에서 만나야 할 문인, 예술인들을 알게 된 것이 통영 여행 첫날 해저터널에서 오래된 땀 냄새 속에서 얻은 소중한 소득이었다.
해저터널을 빠져나오니 이젠 섬이 아닌 뭍에 서 있었다. 해저터널 입구에서 다시 잔잔한 바다와 그 건너 섬과 이들을 품은 하늘이 어울린 풍경에 취해 주변을 둘러보다 계단 저 위의 위엄 있게 보이는 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 가까이 올라서니 鑿梁廟(착량묘)라는 현판 글씨가 보인다.
착량(鑿梁)이란 한자를 뜻 그대로 풀이하면 ‘파서 만든 다리’다. 사람들이 판데목이라 부르던 곳을 착량이라는 한자로 표기했을 것이다.
착량묘는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이순신 장군이 1598년(선조 31년)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전란이 끝난 이듬해인 1599 전쟁에 참여했던 수군들과 주민들이 그의 충절과 위업을 기리기 위해 이 언덕 위에 초가지붕의 사당을 짓고 기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300여년이 흐른 뒤 1877년(고종 14년) 제198대 통제사였던 충무공의 후손 이규석이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고쳐 짓고 착량묘라는 편액을 달았다.
이 당시 서당의 기능을 하는 건물인 호상재(湖上齋)를 함께 지어 지방민 자제들을 교육했다.
착량묘는 1974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된 후 1979년부터 1985년까지 동재, 고직사, 외삼문, 일각문 등이 신축되면서 서원의 모습을 갖췄다.
착량묘는 현재 재단법인 통영충렬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충렬사에서는 봄과 가을에 향사를 하고 착량묘에서는 해마다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이 돌아가신 날을 추모하는 기신제를 지내고 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면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곳이 많은 곳이 통영이다. 어지간히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석 달 일정으로도 통영을 보고 왔다고 말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며 강구안 방향으로 눈길을 줬다.
오늘 중으로 강구안 중앙시장에 발을 들일 수 있을까.
▶글쓴이 오근식=1958년에 태어나 철도청 공무원, 인제대학교백병원 그리고 건국대학교병원에서 일했다. 2019년 2월 정년퇴직하고 걷는 여행 중이다. 퇴직 첫 해 제주에서 1년 동안 걸었고 다음엔 고창에서 석 달 걸었다. 그리고 세 번째 여행지가 통영이었다. 현재는 부산 오륙도 선착장에서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까지 750 킬로미터의 해파랑길을 걷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