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클레임] ‘느림의 미학’이라고나 할까. 5~10분으로 끝나버리는 한 끼 식사를 30분 동안 즐기려 노력한다. 지하철을 타면 20분은 더 빠르게 갈 수 있는 거리를 일부러 버스를 탄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다. 바삐 달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조선시대 선비처럼 뒷짐을 지고 움직이면 ‘그렇게 해선 이 사회를 살아갈 수 없다’는 훈수들이 날아온다.
맞는 말이다.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받는 사회다. 여유를 즐기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돼버린다. 노후 준비도 마찬가지다. 취직 성공과 동시에 준비했던 노후 준비는 20대부터, 더 빠르게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시작한다. 금수저를 들고 태어난 이들은 별걱정 없이 미래를 즐길 수 있지만, 평범한 이들은 어떻게 해야 일확천금 인생을 살 수 있는지 그 기회를 골똘히 생각한다. 그 길로 가는 방법 중 하나가 ‘암호화폐’였다.
한때 2030세대에서 암호화폐 투자 광풍이 불었다. 누구를 만나도, 어디를 가도, TV를 틀어도, 기사를 봐도 암호화폐 이야기뿐이었다. 어쩌다가 노후 이야기가 나오고 ‘회사 월급으로 저축하면서 그냥 살려고요’라고 말하면 한심한 눈초리들이 날아왔다. 그러면서 한마디씩 말을 얹었다. “통장에 돈을 쌓아놓기만 하지 말고 주식을 하거나 코인을 해. 그래야 돈도 빨리 벌고 집도 사고 편하게 살 수 있어.”
이처럼 ‘코인’, ‘암호화폐’를 떠드는 이들은 많은데 그만큼 번 이들이 있을까? 틈만 나면 오르락내리락하는 시장 상황을 주시했던 이들도, ‘지금은 코인 시대’라며 떠들던 이들도 이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많이 벌었냐는 질문에 한숨만 푹 내쉴 뿐이다. 실제 엘림넷 나우앤서베이가 전국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주식 투자 경험이 있다고 한 응답자 중 ‘2020년 이후 당신의 주식 투자 성과는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에 60.4%가 ‘손실을 입었다’고 답했다. 이익은 24.1%, 원금 유지 수준은 15.5%에 불과했다. 이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암호화폐 시장에 뛰어들었다가 손실만 입은 이들이 상당수임을 가늠하게 하는 결과다.
이번에는 ‘손실’ 비중이 더 높아질 전망이다. 세계 3위 암호화폐거래소인 FTX가 파산신청을 하면서 국내에도 파장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FTX는 국내에서 직접 영업을 하지 않아 한국의 개인투자자 피해는 한정적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그래도 FTX의 국내 이용자 규모가 1만여명에 이른다니 피해가 없을 수는 없다, 개인뿐만 아니라 일부 국내 기업도 FTX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져 피해는 더 클 것으로 보인다.
암호화폐 투자가 잘못됐다고 말할 수 없지만 일상에 영향을 줄 만큼 무분별한 투자는 일종의 ‘도박’과 같으므로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해야 한다는 경고는 꾸준히 있어 왔다.
자율규제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정부와 국회가 투자자의 피해를 막기 위한 법·제도적 규제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현재 국회에는 암호화폐 등 디지털자산을 법적 테두리 안에서 규제하고 이를 통해 투자자를 보호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이른바 ‘디지털자산법’이라 할 수 있는 법안이 총 3건 발의돼 있다. 여야 의원이 발의한 법안 내용에 큰 차이가 없고,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대선 공약으로 디지털플랫폼정부를 내건 이번 정부의 국정 과제이기도 하니 법 제정에 미적거릴 이유는 없다. 이번 사태를 주시하며 관련 법을 제정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