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클레임] 우리사회에서도 공공의 갈등 문제를 당사자들의 참여 속에 합리적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이 늘어나던 시점이었다. 청계천 복원 과정 속에서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고 예상되는 갈등 및 분쟁을 해소 하려는 노력은 시대의 보편적 흐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2007년 초 서울시는 ‘동대문 운동장 풍물벼룩시장 발전협의회 이하 발전협의회’를 구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합의절차 문제가 거론이 되면 845여 차례 노점상 당사자들 간의 논의와 합의가 있었다는 식으로 대응을 해왔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발전협의회’는 실질적으로 오세훈 서울시장 측에서 동대문 운동장을 허물고 새로운 랜드마크를 짓는데 필요한 사회적인 명분을 삼으려는 일종의 여론기구가 되었다.

2007년 1월 16일 동대문풍물벼룩시장과 서울시와의 1차 발전협의회는 노점상 대표로 전국노점상총연합의 한기석 부의장과 필자를 포함하여 5명의 노점상이 서울시 정동진 건설국장 외 5명과의 면담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동대문운동장 공원화사업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공약사항으로 동대문야구장은 금년 안에 철거 하고 대체구장을 건설할 계획이라는 주장을 먼저 내놓았다. 그리고 서울시 균형발전본부 측도 동대문 공원화사업에 대하여 시민아이디어 공모전의 결과를 발표하며 자료위원회에 통보했고 5월 경 설계를 완료할 예정이라는 언론을 통해 보도된 뻔한 이야기를 브리핑하는 자리로 일관하였다.
하지만 노점상 측에서는 이명박 시장 시절 합의한 ‘동대문 풍물 벼룩시장 활성화 방안인 홍보 및 편의시설에 대한 신속한 지원’을 요구하며, 동대문 운동장은 서울시민의 역사적 유물로 체육시설의 가치는 존중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그리고 도난 방지 및 화재방지를 위하여 용역경비에 대한 철저한 관리를 비롯하여 발전협의회가 건설적으로 운영되기 위해 서울시는 동대문 풍물 벼룩시장 노점상의 생존권을 분명히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2007년 2월 27일 2차 회의부터 서울시는 ‘발전협의회’는 동대문운동장 내 노점상 철거 반대 방침이 관철되는 기구가 아니라며 ‘동대문 공원화 사업’ 건설계획을 다시 통보하였다.
특히 2차 발전협의회가 있기 직전 ‘서울시 노점 대책’ 이라는 주제로 기자회견을 개최하여 노점시범 거리 조성과 노점개선 자율위원회 참여를 반대하는 노점상은 단속하겠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하였다. 그 후 회의참석자 중 ‘단체’ 중앙 실무자의 참석을 배제하는 등 동대문 풍물 벼룩시장과 사전협의를 통해 운동장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파기한다. 그 후 동대문운동장 풍물시장 노점상 일부를 대상으로 선별하여 동대문운동장 발전협의회라는 기구를 비공식 비공개적으로 운영하다 2007년 8월 22일 동대문구 숭인동 숭인 여중 부지에 ‘청계천 풍물 벼룩시장’을 건립하고 동대문운동장은 허물게 될 것이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는 언론을 통해 보도하기에 이른다.
2007년 문화재청은 동대문운동장에 관한 ‘근대 문화유산 조사보고서’를 통해 동대문 쪽 성벽은 복원되어야 하고 동대문운동장은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민사, 정치사와 직접 관계되는 장소이기 때문에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동대문운동장 자리는 조선 후기 수도방위사령부 격의 훈련도감 최대 병영이 있었던 자리다. 일제 강점기 1925년 일본의 동궁(쇼와 덴노) 결혼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경성 운동장으로 건설되었지만 암울했던 시절 조선인들의 울분을 달랬던 곳이다. 동대문운동장을 찾아 경기를 관람하며 희로애락을 함께한 인원은 또 얼마나 많을까? 1962년부터 1966년까지 대대적인 보수공사와 확장공사로 육상경기장을 비록 야구장·수영장·배구장·테니스장 등 국제 규모의 운동경기를 치를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졌는데 서울의 핵심적인 요충지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동대문 운동장은 서울 올림픽주경기장이 개장하기 전까지 전국체전을 비롯하여 다양한 체육대회를 치러야 할 때는 메인 스타디움 역할을 하였다. 자그마한 간이역이나 돌담길, 최초의 짜장면집도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보존하자는 움직임이 잇는데 1수 많은 사람의 애환이 담겨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체육시설 ‘동대문운동장’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국적 불명의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다.

2007년 8월 체육시민연대와 문화연대 및 진보적인 정당들과 함께 동대문운동장 철거 반대 공동대책위가 구성되어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려는 반문화적인 오세훈 시장을 규탄하며 ‘기자회견’과 ‘스포츠인 100인 선언’ ‘동대문운동장 보존을 위한 시청 앞 1인 시위’와 대중집회 등을 개최하였다. 2007년 겨울 대선을 얼마 앞두고 동대문 운동장 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터라 오전 11시경 현장에 도착했다. 이날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노점상들이 천막 안 난로 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서울시가 가림막을 쳐놓은 사이로 몇몇 용역반 차림의 사람들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경비를 서고 있었다. 순간 거대한 포클레인이 움직이는 것이 가림막 사이로 눈에 띄었는데 이미 운동장을 철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트럭이 흙을 퍼 나르며 야구장 뒤편을 거대한 포크레인으로 서서히 잠식해가고 있었다. 용역반들이 카메라를 막고 사진 촬영을 저지했고 격렬한 몸싸움이 있었다. 철거가 있던 바로 전날까지 서울시는 당분간 철거하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또 거짓으로 에둘러 놓고 손을 놓고 있는 사이 철거를 강행한 것이다. 당시 시민들이 대선이라는 정치 일정에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틈타 일방적인 철거를 강행한 것이다.
노점상과 같은 도시빈민에 대한 서울시의 대응책은 겉으로는 합의적 성격을 띠었으나 내용으로는 집단이주 정책과 배제 정책으로 일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주 정책은 일시적으로나 제한적으로 제도권 안으로 포섭하는 정책을 쓰지만, 궁극적으로는 도시빈민을 배제하는 정책이라 볼 수 있는데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71년 8월 10일 경기도 광주대단지(현재의 성남시)에서 벌어진 주민 수만 명이 서울의 철거민을 집단 이주시킨 무계획적인 도시정책과 졸속행정에 반발하며 항의했던 사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기 위해 내놓은 오세훈 서울시장의 ‘노점상 관리대책’은 최근까지 서울시 노점상의 숫자를 절반 이하로 줄이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이 시기부터 사라진 대부분 노점상은 단속과 합의라는 이중적인 정책의 희생물이 되기도 하였다. 동대문운동장 내 풍물 벼룩시장의 경우에도 일부는 또 다른 장소로 이전시켰지만, 주변의 많은 노점상은 삶의 터전을 잃고 떠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이러한 단속은 최근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완공 이후에도 아직 계속되고 있다.

2022년 11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건너편에서 장사하는 노점상 양춘석 씨를 만났다. 누군가 내 편이 되어 주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던 그는 1980년도부터 이 자리에서 장사했다. 이일대의 변화를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지켜보고 있는 셈이다.
“2014년 3월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완공을 갖추기 몇 달 전 중구청은 일대의 노점상을 모두 부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상인들은 차량 위로 올라가고 또 누군가는 차 밑으로 기어가 싸웠습니다. 평소 말이 없던 이웃이 어디서 저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명분은 구청이 인근 상가에서 민원을 넣어 단속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청계천 일대는 오랫동안 노점상이든 상가든 점포 밖으로 물건을 적치시키며 장사 하는 곳입니다. 특히 평화시장 일대는 더욱 그렇습니다. 시장이 보통 그렇지 않습니까? ”
양*석 씨의 말대로라면 상가부터 모두 단속하고 처벌해야 형편이다. 결국 노점상과 상가의 합의로 현재와 같이 소위 ‘자율 질서’ 를 하며 장사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날의 단속은 실제 동대문 디자인플라자 완공되기 직전에 진행된 단속이었다. 이들의 눈에 노점상이 거슬렸던 것이다. 중부지역의 책임을 맡은 우종숙 씨는 인상 깊었던 것은 내일 같이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어느 해에는 학생들이 달려와 ‘빈민연대’ 활동이라는 것을 하였습니다. 방향을 찾을 수 없고 나침반이 사라진 거처럼 답답한 세상에 같은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거리에서 장사한다는 이유로 욕을 먹고 사람들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또 다른 이웃의 고통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청계천변의 사람들은 그동안 정부 정책의 지원 없이 스스로 그곳에 삶의 터전을 일구고 살아 왔다. 각각의 독립된 업종들이 군락을 형성하거나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촘촘히 엮인 그물망처럼 삶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 년 동안 서울시의 정책은 이들의 삶의 터전에 일대 변환을 일으키고 있다. 그 하나는 청계천 복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대규모 공사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동대문 운동장 철거와 이에 연장선에서 계획되고 있는 주변부 정비와 개발 사업이었다. 그리고 최근의 청계천 을지로 공구상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아마도 다음 계획은 세운상가를 허물겠다는 것이고 그리고 창신동 일대 대규모 개발 계획이다. 도시는 필연적으로 공간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을 낳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청계천은 한국의 개발과 성장이라는 이름으로 이처럼 장소성, 역사성은 계속해서 유린당해 왔다. 삶의 공동체가 파괴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지금과 같이 경제적 가치만 운운하는 것은 너무 서글픈 일이지 않은가? 이상으로 청계천 복원 추진 과정과 청계천 을지로, 동대문운동장 주변에서 생계 터전을 일구던 이들과의 합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청계천 일대의 개발을 둘러싸고 시민사회단체의 철저한 감시가 더욱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생각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