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의 성자 노무라 모토유키 할아버지 이야기 -1

[뉴스클레임]

1970년대 청계천모습 사진=노무라모토유키
1970년대 청계천모습 사진=노무라모토유키

청계천을, 자전거를 이용해 출퇴근하고 있어요. 특별히 눈이 오거나 비 오는 날이 아니면 빠지지 않고 달리죠. 이곳을 설명하는데 빠질 수 없는 분이 계십니다. 바로 노무라 모토유키이십니다. 혹시 이분을 아십니까? 기억하시는 지요.

이분은 청계천 관련 사진, 스크랩북, 메모지, 한국 지도 등 800여 건의 개인 소장 자료를 지난 2006년 서울시에 기증했습니다. 청계천 박물관과 서울 역사박물관에 할아버지께서 기증하신 사진과 자료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고 전시도 개최되었지요. 바로 위의 사진이 할아버지의 청계천 사진입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청계천을 비롯해 서울의 생활사를 엿볼 수 있는 기록물에 꼭 등장하는 사진입니다. 한양대학교 아래 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으로 보입니다.

인터넷에 청계천단어를 입력하시면 오래된 할아버지의 사진을 엿 볼 수 있을 겁니다. 할아버지께서 한국의 빈민 선교를 위해 애쓰신 흔적은 많지만 대표적으로 "한국으로 보낸 돈이 7,500만 엔(81,500만 원) 정도로 알려졌습니다. 대부분 70년대와 80년대에 보내진 액수입니다. 이러한 선행이 알려지면서 지난 2015년 서울시에서 수여하는 제1회 아시아 필란트로피 상을 받았습니다.

청계천의 아이들. 사진=노무라모토유키
청계천의 아이들. 사진=노무라모토유키

할아버지의 직업은 목사이십니다. 하지만 인기 씨 나는 할아버지입니다. 그렇게 불러주세요. 그리고 예수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할아버지로 불러 달라 당부하십니다. 아마도 목사가 누리는 권위와 일방적인 존경을 거부하는 듯합니다. 특히 사회적 신분이나 격차를 나타내는 표현을 무엇보다도 싫어합니다.

이제 할아버지와 제가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청계천과 사대문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 정착한 곳은 성북구 월곡동과 길음동, 노원구 백사마을 등이 있습니다. 제가 한 인터넷 언론에 청계천을 비롯해 도시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 연재했었습니다. 노원구 백사마을 입구에서 이발소를 운영하신 김창호 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요. 우연히 이 사진을 본 할아버지께서 청계천에서 알던 사람이 백사마을 현대이발관 주인과 닮았다며 이분을 찾는다는 소식을 저에게 해 오셨습니다.

안녕하세요. 혹시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소설 아시나요?”

네 당연히 알죠. 영화로도 제작되었잖아요

맞아요. 그 소설을 쓴 사람이에요. 궁금한 게 있는데 노무라 모토유키씨도 아시나요?”

혹시 청계천 사진을 남기신 분 아니세요?”

아마도 이런 내용의 통화를 했던 거 같아요. 평소 마음에 담고 있던 분께서 직접 전화를 주시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바로 다음날 백사마을을 방문해 이발관 아저씨의 사연을 들어보니 안타깝게도 청계천에서 이주해 오신 할아버지께서 찾는 분이 아니더군요.

정성스럽게 소식을 정리했습니다. 제가 일본어를 배우지 않아 인터넷 번역기를 이용해 전달했습니다. 곧 할아버지께서도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주셨어요. 저는 그리고 잠시 잊고 있었죠. 그 후로 어느 날 집에 작은 소포가 하나 배달됐습니다. 그 안에는 할아버지께서 촬영한 수천 장의 청계천 사진이 USB에 담겨 있었습니다. 정말 놀라운 사진이었습니다. 더러운 청계천의 판잣집에 눈길조차 주지 않던 시절 할아버지께서는 빈민 선교를 하며 사람들의 삶을 차곡차곡 담으셨던 것입니다. 인기 씨가 청계천에 대한 사진과 글을 많이 남기니 답례로 사진을 보내주시겠다며 잘 사용하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저는 지인들과 상의했어요. 이사진을 출판해 많은 사람들이 함께 봤으면 좋겠다고요. 지금 청계천의 이면을 알 수 있지 않겠냐고 말했지요. 하지만 말리는 사람도 있었어요. 더럽고 비루한 그곳을 사진집으로 남기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냐며.저는 곧바로 사진 전문 출판사 눈빛을 방문했어요. 이규상 대표께서 USB에 닮긴 사진의 가치를 바로 알아보시고, 두말할 것 없이 바로 책을 발간하자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사진집이 2013년 두툼한 책으로 발간된 노무라 리포트입니다. 같은 출판사에서 2020강촌에 살고 싶네’ 1970년대 개발독재시대 한국과 한국 민중의 모습을 담은 유신의 추억이 발간되어 시대를 증언하고 있습니다.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앞에서 플루트을 연주하는 할아버지의 모습. 사진=최인기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앞에서 플루트을 연주하는 할아버지의 모습. 사진=최인기

이 밖에도 그의 활동을 알 수 있는 일화들이 많습니다. 20122노무라 모토유키목사는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잘못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주한 일본대사관 소녀상 앞에서 플루트를 꺼내 한국 가곡을 연주했습니다. 한 언론사 기자가 한·일 관계를 풀기 위해 양국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묻자 일본은 딴소리 말고 사과부터 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한국 언론은 일제히 그를 보도하며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본 일본 우익 세력으로부터 협박을 받기 시작했고 할아버지가 머무는 집 근처까지 찾아와 위협했습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자, 한국을 다녀갈 때마다 나와 단둘이 또는 가족과 함께 조용히 서대문 형무소를 방문하거나 탑골공원에 새겨진 벽화 앞에서 머리 숙여 일제 만행에 대해 사죄의 기도를 하거나 조용히 플루트 연주를 하였습니다. 언젠가는 출국을 몇 시간 앞두고 일본대사관 소녀상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텐트 위로 비가 추적추적 내렸습니다. 좁은 텐트 안에 들어가자, 내부에 습한 기운이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는 한국의 청년들과 조곤조곤 대화하며 한일 관계에 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다독이고 격려하셨습니다. 2014년에는 나와 함께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농성장이 있던 대한문을 방문하셔서 함께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같은 날 빈곤사회연대용산참사 진상규명위원회와 같은 사무실에 방문해 후원금을 전달하셨습니다.

2019년 청계천을지로를 방문해 사진 촬영 중. 사진=최인기
2019년 청계천을지로를 방문해 사진 촬영 중. 사진=최인기

 

그 후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202211월 가족들과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해 전태일 기념관옆 호텔에 숙소를 잡고, 출국 전까지 동료들과 함께 바쁜 일정을 보냈습니다. 이 밖에도 청계천 등 여러 현장을 방문하여 활동가들과 대화하고 토론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셨습니다. 오래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던 곳을 방문해 이들을 지원했던 노무라 할아버지는 한국 종교 운동과 청계천 일대의 활동을 정리한 자신의 생애사를 지인들에게 전달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현재 일본 야마나시현 야쓰가다산 산골에서 가정교회인 베다니교회에서 조용히 목회하지만, 지금은 건강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6월 8일 그의 아들로 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부모님께서 3년 정도 전부터 고령으로 산골 생활과 자동차 운전의 위험성이 있어 상담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1년 반 전부터 건강이 약화 되어 5월부터 함께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입니다. 아마도 부모님 모두 집에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합니다. 올해 한국 나이로 할아버지의 나이는 94세입니다.

얼마 전 눈빛 출판사 이규상 대표의 제안으로 인사동에 갤러리 인덱스에서 전시가 611일부터 23일까지 개최될 예정입니다. 노무라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인들과 그리고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618일 오후 5시에 갤러리에서 모임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건강이 하루속히 회복되기를 빕니다.

노무라 할아버지의 사진전시 소식. 사진=인덱스
노무라 할아버지의 사진전시 소식. 사진=인덱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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