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동 대공분실을 기억하는 사람들

[뉴스클레임]

남영동대공분실 전경 사진=최인기
남영동대공분실 전경 사진=최인기

6·10 민주항쟁 38주년을 맞아 고문과 인권 탄압의 상징이던 '남영동 대공분실' 재탄생을 알리는 소식을 접했다. 611일 오후 급히 카메라를 챙겨 들고 자전거에 몸을 실어 남영동 대공분실로 향했다. 우리 단체 사무실 청파동에서 지하철 1호선 남영동까지 자전거로 5분 거리다. 철로 아래 거칠게 전철 지나는 소리를 들으며 횡단보도를 막 건너려는 순간 박종철 기념사업회 이사 김학규씨를 만났다. 대공분실 앞에서 1인 시위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다.

서울 곳곳에는 북한의 남파 간첩과 국가보안법 위반자 등을 취조하고 심문하기 위해 경찰청 보안국이 설치했던 대공분실또는 보안분실이 존재했다. 이곳은 한마디로 간첩잡는 곳이다. 아니면 국가보안법위반자 등을 취조하고 심문해 '빨갱이'로 만든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실제 군사독재 시절 권위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나섰던 청년 학생과 민주화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상이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이 서울 1호선 전철 남영역 인근 대공분실이다. 표지판에 따르면 19764월에 생긴 것으로 되어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당시는 치안본부 제3부 정보2과였으며 19816월 대공과로 개편된다. 악명 높은 공간에서 희생된 대표적인 사람이 1987년 서울대학교 3학년생이었던 박종철 열사다. 그는 경찰에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던 중 목이 욕조에 눌려 질식 사망하였다. 이로 인해 시민들은 들불처럼 일어나 1987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마침내 군부독재는 두 손을 들었다. 이 밖에도 또 다른 사람이 있다. 정치인 김근태가 민주화운동청년연합사건으로 잡혀 들어가 반복된 고문을 당하였다. 이후 남영동 대공분실은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1985’로 제작되고,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에서도 다뤄지며 알려진다.  

원형계단의 모습 사진=최인기
원형계단의 모습 사진=최인기

이밖에도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해 충격을 더해 준 곳으로도 유명하다. 검은색 건물의 높은 담장 그리고 철문으로 제작된 외관은 주변 상가에서도 심상치 않은 건물로 익히 알려졌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출입하는 계단도 직원이 사용하는 계단과 수용자를 잡아들일 때 사용하는 건물 뒤의 쪽문과 고문실로 가는 계단이 따로 설치되어있다. 김명식의 책 건축은 어떻게 아픔을 기억하는가 : 뜨인돌 출판사를 보면 서울의 경동교회에 대해서는 절제된 재료로 만들어내는 최상의 공간으로 신비롭고 포근한 신의 품 같은 공간으로 비유하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에 대해서는 잔인하고 비인간적이며 반인권적인 공간으로 규정한다. 선과 악이 극명하게 나타나는 건축물로 이를 설계한 건축가 김수근을 이해하기 힘든 사람으로 지목한다. 

이렇게 외부와 차단된 채 고립되어 엄청난 곤욕을 치러야 했던 장소는 서울에만 홍제동을 비롯해 6곳이 더 존재했다. 아니 국정원의 전신 안기부와 군 기무사 등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더 늘어 날 것이며, 밝혀지지 않은 많은 곳에서 군부독재는 밀실을 두고 탄압을 자행했다.

509호 박종철열사의 조사실 사진=최인기
509호 박종철열사의 조사실 사진=최인기

단체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나섰다. 이들은 민주인권기념관으로 재탄생시켜 세계적인 역사 기념물로 만들고자 하였다. 하지만 남영동 대공분실의 원형 복원이라는 문재인 정부 시설 합의사항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재오 이사장이 등장하면서 헌신짝처럼 내다 버렸다. 그 대표적 사례로 대공분실 6층과 7층은 고문 수사의 우두머리 박처원의 집무실이 있던 곳이지만 그곳을 기념사업회 사무실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날 실제로 필자가 대공분실에 입장하려 했지만, 행사가 없다는 이유로 입구에서 제지당해 실랑이 끝에 가까스로 1층 원형 계단을 촬영할 수 있었다. ‘대공분실 자료에 따르면 수용자를 1층에서 피조사자를 이동시키기 위한 나선형의 어둡고 좁은 원형의 철제 계단을 이용하게 되어 있다. 다른 층을 통하지 않고 계단 층수 표시도 없으며 얼굴에 검은 포댓자루 같은 것이 씌워지고 몸은 밧줄로 묶인 채로 끌려가는 조사 대상자들은 자연스럽게 방향 감각과 고도 감각을 상실하여 공포심을 극대화하도록 제작되었다고 한다. 끝은 미로처럼 어두워 보였다. 그곳에 이끌려 계단을 올랐을 사람들을 떠올려 봤다.

5층 고문실에 입장해 박종철 조사실 등 몇 곳도 촬영할 수 있었다. 300mm의 수직 창이 설치되어 있어 사람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하였으며 의자와 책상은 모두 바닥에 고정되어 있고, 전등은 철망으로 막아서 만질 수 없게 해 놓았다. 조사 시 완벽한 방음을 위해 흡음판을 설치해 외부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했다. 6층과 7층은 접근이 불가능했다. 이곳은 집무실 외에도 과거 고문 수사관의 체력 단련실로 사용되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을 기억하는 사람들’ 에 따르면 명칭을 둘러싸고 남영동 공간은 한국 민주화운동 전체를 담기보다는 최악의 국가 폭력 고문 수사의 현장이라는 성격이 강하므로 남영동 대공분실 인권기념관으로 변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재오 씨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라는 직책에 맞느냐는 원점부터 살펴야 할 것이며기존 합의를 파기하고 일방적 행정을 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분명 남영동 대공분실은 과거 잘못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다시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한 교훈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제대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민주화운동의 목소리를 담고자 하는 소중한 공간 운영의 주체는 국가 폭력 희생자들과 그의 정신을 살리려 노력하는 이들의 노력이 반영되는 것이 기본 상식이다.

남영동대공분실 5층복도 사진=최인기
남영동대공분실 5층복도 사진=최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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