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970년대 제정구 전 의원과 함께 서울 청계천 변에서 빈민 구제 활동을 펼친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의 아들에게 메일이 날아왔다. 향년 94세로 조용히 하늘의 부름을 받으셨다는 소식이다.
고인은 어린 시절 1930년대 일본에서 조선인이 차별당하는 모습을 본 뒤 조선을 돕겠다는 결심을 했다. 한국전쟁 무렵 도쿄수의대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를 통해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노무라 목사는 도쿄 수의 축산대학, 미국 켄터키 성서대학(남동부 기독교대학), LA 바이올라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그리고 1961년 일본으로 귀국 후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68년 여름 첫 한국 방문 하여 청계천 빈민가의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당시 제정구 전 의원 등을 만나 함께 활동한다. 1980년대 중반까지 서울을 여러 차례 오가며 빈민 선교를 했었다. 뉴질랜드와 독일교회로부터의 탁아소 건축비를 모금하고, 도쿄의 주택을 처분하여 한국의 탁아시설 건립 등을 지원했다. 이 당시 빈민 선교를 위해 한국으로 보낸 돈이 “7,500만 엔(약 8억 1,500만 원) 정도로 알려졌다. 그 후 이 돈이 어떻게 사용된 지는 누구도 밝히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교회의 도시 빈민 선교사에 중대한 오점이 아닐 수 없었다.
2006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청계천 사진을 비롯하여 전국을 돌며 찍은 사진 5천여 점과 자료 를 한국에 기증했다. 그의 사진은 눈빛 출판사에서 3권의 사진집으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박물관, 전태일 기념관, 서울 생활사박물관’ 등에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한국의 근현대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2012년 한국 방문 당시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위안부 소녀상에 무릎을 꿇고 속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가방에서 플루트를 꺼내 한국 가곡을 연주했다. 한국의 언론은 이 모습을 크게 보도했다. 이로 인해 일본의 극우세력에게 시달렸다. 2013년 그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시 명예시민으로 선정되었고, 2015년 ‘아시아 필란트로피 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고인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일제 강점기 한국의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했다. “일본은 딴소리 말고 사과부터 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빈민구제 활동도 계속 이어졌다. 생활비를 절약해 2009년부터 푸르메재단을 후원했다. 이 밖에도 넥슨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을 위해 기부했다. 2013년에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농성장을 방문해 평화로운 해결을 바란다고 전하기도 했다. 같은 날 빈곤사회연대와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사무실을 방문해 후원금을 전달했다.
2025년 6월 11일부터 23일까지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에서 ‘한 일본인 목사가 한국에 남긴 사죄와 사랑의 기록, 노무라 컬렉션’이 개최되었다. 한국에 대한 헌신과 봉사 그리고 그가 한국에 남긴 사진들에 대한 감사의 자리였다. 노무라 목사와 인연을 이어온 ‘백경학 푸르메재단 상임대표’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그의 헌신과 희생을 기억했다.
18일 병상에 있는 노무라 목사 부부의 쾌유와 평안을 기원하는 ‘노무라 목사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열렸다. 이 자리에 오래전 청계천에서 함께 활동한 ‘사회복지법인 복음자리의 신명자 이사장과 박재천과 동료들 그리고 아동문학작가 임정진, 민주노점상전국연합 고문 노수희와 소순관, 여전도회 작은자복지재단 사무국장 이승재,’ 등이 참석해 고인의 활동을 회상했다.
7월 1일부터 4일까지 노무라 모토유키부부가 입원해 있는 병원을 방문했다.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는 악성 림프종 진단을 받고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었다. 수척해진 얼굴에 세월의 노곤함이 묻어 있었다. 한국 지인들의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 몇몇 기독교인들은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다니엘 12:3”라는 문구가 새긴 액자를 그에게 선물했다. 노무라 목사 부부는 그 액자를 끌어안고 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27일 그의 아들로부터 소식이 왔다.
“안녕하십니까? 더운 여름인데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가요?
26일 새벽 2시 40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병원 침대에서 잠든 채 그대로 호흡이 멈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여러분의 도움을 받아 기쁨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지금쯤은 계속 신경 쓰고 있던 북쪽 아이들의 모습을 보러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일(28일) 화장합니다.
어머니는 안정되어 있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 근처에서 시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법률적인 절차나 정리를 마치고 조금 진정되면 방한하려고 합니다.”
아들로부터 도착한 메일을 확인하고 한국 지인들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모두들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했던 고인의 별세를 안타까워하였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헌신과 사랑으로 한 평생을 살았던 고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추모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