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기천 기자
사진=김기천 기자

바뀐 게 하나도 없었다. 죽음의 외주화는 여전하고 정부는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 희망고문으로 노동자를 우롱했다. 기업은 노동자들의 목숨을 팔아 경영을 이어가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그 목숨을 이용하고 있다.

21일 오전11시,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위험의 외주화 금지 약속 파기' 문재인정부 규탄 기자회견은 정부가 산안법 하위법령 개정으로 노동자들을 어떻게 이용했는지 자세하게 알려준다.

이날 산재 피해자 유가족,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원회,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는 "위험의 외주화가 근절될 줄로만 믿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속임을 당했다"며 "산안법 하위법령 개정안은 또 다시 위험의, 죽음의 외주화의 시작"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태안화력발전소 비정규직 고(故)김용균씨의 사망에 따라 산안법 개정이 추진됐고, 국회에서도 관련법이 통과되기도 했었지만 정작 죽음의 외주화는 법안에 넣지도 못해서 반쪽 개정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그 하위법령마저 노동자 편은 아니었다. 정부가 입법예고한 시행령은 도급승인을 받는 범위를 4개 화학물질의 설비·보수·해체·철거 작업 등으로 제한했다. 도급금지에서도 제외됐던 구의역 사고와 태안화력 김용균 씨의 업무는 도급승인에서조차 빠졌다. 조선업 하청업무도 도급승인 대상에서 제외됐다.

결국 또 헛된 죽음이라는 말만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이날 기자회견이 정부의 산안법 성토장으로 변한 이유다.

포문은 김미숙 김용균씨의 어머니가 열었다. 김 씨는 "하위법령을 높이고 보완해서 안전하지 않은 사업장은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며 "국민의 안전은 어떤 이유에라도 다른 것보다 최우선시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용균이를 잃고 모든 게 깨졌다. 희망이 없는 삶이다. 용균이가 남겨준 숙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용균이를 볼 수 있다"며 "기업이 무서워하는 법이 있어야 한다. 정부를 믿지 못한다. 우리들 스스로가 다 같이 뭉쳐서 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한빛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이사장은 "방송 노동자들의 인권이 말살되고 있다"며 "노동자로서 보장받아야할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용역 계약이기 때문에 산재 보험을 받을 수 없다. 그런데 이런 내용들을 종편과 지상파방송은 이한빛PD 죽음 이후 방송노동자들의 인권을 다룬 내용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나마 산안법이 통과돼서 매우 행복했는데, 실상은 여전했다. 최근에 드라마 제작 현장을 찾아가서 실태를 확인했는데, 산안법 통과 전과 똑같았다. 주당 120시간이 넘는 곳도 있었다"고 전했다.

집배노조 허소연 교육선전국장은 "집배원들은 죽을 각오를 하고 2745시간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이렇게 직무에 시달려 사망한 집배원들이 수십 명"이라며 "집배 노동자들이 죽어나가지 않게 구조적으로 막아줄 수 있는 게 산안법이다. 그러나 이미 있는 산안법마저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집배원들은 옆 동료가 죽어나가도 단 한 번도 작업 정지를 하지 않았다. 어제 같이 술 한잔하려했지만, 피곤해서 먼저 들어가 쉰다는 동료들이 죽어 나갔는데도 그 어떤 대안이나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동료가 죽어나가는 걸 두 눈으로 보고 있어야 했다"며 "이번 시행령에서도 이 같은 내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은 담기지 않았다. 국민이 준 의무를 정치인과 정부가 져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최성균 발전노조 한전산업본부장은 "기대한 만큼 실망은 컸다. 28년 만에 산안법 개정 과정을 겪으며 안전한 일터를 꿈꿨지만, 현실은 원청의 책임자 처벌, 도급금지, 위험의 외주화 근절 등 어떤 것도 시행되지 않았다"며 "세치 혀로만 책임자 처벌 원청 책임 강화를 외치는 정부와 정치권은 반성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본부장의 말대로 이번 시행령에서는 원청 책임 강화도 대폭 후퇴했다. 정부는 건설기계 27종 중 타워크레인, 건설용 리프트, 항타기, 항발기 등 4개 기계에만 원청 책임을 적용했다. 사고가 빈번했던 덤프, 굴삭기, 이동식 크레인등 사고다발 기계는 제외됐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최근 5년간(2011∼2015년) 건설업 산재사망 중 굴삭기, 트럭류, 고소작업대(차), 이동식크레인, 지게차 등 5대 건설기계·장비에 의한 사망자는 693명이다.

그야말로 입법 예고된 산안법 하위법령이 졸속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날 쉽게 기자회견장소를 떠나지 못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지나가던 시민들을 붙잡고 하소연하고 싶다는 말도 했다. 어떻게 이런 법이 있냐고 허공에 대고 외치며 분노를 표출했다. 공허함만 남았다. 그리고 다시 들메끈을 고쳐 매는 심정으로 '투쟁' 이 두 글자를 아로 새겼다.

영상촬영=김기천 기자

편집=이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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