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46코스

[뉴스클레임]
해파랑길 46코스는 속초 최북단의 항구인 장사항을 출발해 해변 10곳과 항구 5곳을 지나는 14.7km의 길이다. 관동팔경 중의 하나인 청간정과 긴 세월 동안 물과 바람이 조각해 놓은 바위, 능파대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2023년 여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걷고 집에서 여름 더위를 피했다. 가을이 되면 다시 가서 남은 다섯 코스를 마무리하기로 했는데, 이해 9월의 더위가 심상치 않아 안전을 위해 한 달을 더 미루었다. 결국, 추석 연휴까지 치르고 10월 초순이 지나갈 무렵 길을 나섰다.

장사항을 출발해 국도변으로 나서면 곧 고성군으로 들어서게 됨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속초해양경찰충혼탑의 안내문을 읽고 지나간다. ‘이곳은 1974년 6월 28일 북한에 의해 피격된 863함과 1980년 1월 23일 출동 경비 중 침몰된 72정의 해양경찰 영령들을 위로하고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영원히 기리고자 건립된 충혼탑입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희생 덕에 이 길을 더 안전하고 행복하게 걷는다.

고성군에 들어서서 다시 바닷가로 나가보니 모래 해변이 아득하게 멀리까지 이어져 있다. 잠시 해변을 보여 주더니 곧 큰길로 돌아 나오고, 다시 해변으로 들어간다. 때론 이렇게 길의 의도를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래도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는 길이고 바닷가 풍경이어서 눈에 꾹꾹 눌러 담는다.
다시 들어간 해변 백사장 근처엔 대형 리조트가 들어서 있다. 리조트이용객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이 늘어서 있다. 리조트가 거의 점유하다시피 한 해변을 지나니 봉포항이다. 이곳에서부터 다시 백사장이 시작되는데 규모는 크지 않으나 상가들이 제법 많다. 이제는 서핑보다는 다이빙 관련 간판이 더 자주 보인다.

마을과 상가가 끝나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작은 해변 끝의 언덕에 청간정이 보인다. 가까이 갈수록 소나무 숲이 울창하게 보인다. 청간정에 올라서니 절벽 아래 모래밭엔 새들이 노닐고 그 너머엔 바다가 푸르다. 그 바다 먼 곳에선 어디까지가 바다고 어디서부터 하늘인지 알 수 없다. 뒤돌아보면 산줄기가 웅장하다, 남쪽으로는 몇 시간 전 떠나온 속초가 눈에 익다.
청간정의 창건 연대는 아직 정확히 알려지지는 않고 있다, 다만 1560년에 크게 수리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보다는 훨씬 더 오래전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간정은 본래 독립적인 정자는 아니었고 이곳 지방에 파견된 관리나 사신을 위한 숙박과 교통 편의를 제공하던 청간역의 부속 건물이었다.
청간역과 청간정은 본래 절벽 아래 바닷가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인 1928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했다. 6.25 전쟁 후 이승만 대통령 당시 다시 지었고 1981년 최규하 대통령 때 다시 고쳐 지었다. 청간정에 전임 대통령 두 명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는 이유다.

청간정 아래 바닷가에서 모래 위에 올라 앉은 노란 꽃을 보았다. 얼핏 보고는 완두콩 꽃이 뒤늦게 피었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꽃이었다. 모래에 갯메꽃 덩굴과 함께 뒤섞여 핀 꽃을 다시 살피고, 확인해 보니 해란초라고 한다. 해파랑길을 걸어 올라오며, 꽤 오래 전 포항 호미곶 근처에서부터 들었던 꽃 이름이었다. 청간정과 함께 오래 기억에 남을 꽃이다.

청간정을 지나면 아야진항인데 마을이 큰 편이다. 오래전부터 아야진항의 어업에 기대어 발전한 듯하다. 아야진항 주변의 해변은 작지만, 배후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유명한 대형 해변보다는 번잡하지 않으니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휴가지로는 안성맞춤이다.
바닷가와 큰길가를 드나들던 길이 바닷가의 작은 산으로 들어섰다,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옹색한 크기이고 높이인데 들어서고 보니 의외로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산은 아닌데도 산에 가야 볼 만한 꽃이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용담, 술패랭이, 구절초, 벌개미취꽃, 며느리밥풀꽃 등 그 수가 많지는 않아도 그 종류는 어느 큰 산보다 못하지 않다. 그 너머에 천학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정자가 하나쯤은 있어야 할 곳이다.

천학정에서 작은 해변을 지나면 고성군 죽왕면 문암2리 해변이다. 여기에 능파대(凌波臺)가 있다. 규모가 매우 큰 기암괴석이다. 옛날엔 바닷가 가까운 곳에 있던 돌섬이었다. 이곳으로 흘러드는 문암천 하구에 모래가 쌓이면서 육지와 연결이 되었고 그 바위벽에 기대어 작은 항구도 들어서 있다.
능파대에는 패여 나간 흔적이 많은 울퉁불퉁한 바위가 많이 보인다. 화강암 틈에 소금이 침투하고 쌓이면서 결정이 커지고, 조금씩 바위를 이루고 있던 광물 등이 떨어져 나가면서 생긴 흔적이라고 한다. 물과 바람이 헤아릴 수 없는 긴 세월 공들여 빚은 작품이다. 눈길 가는 곳마다 탄성이 함께 간다. 해파랑길46코스는 청간정과 능파대와 해란초의 길이다.

글쓴이 오근식=1958년에 태어나 철도청 공무원, 인제대학교백병원 그리고 건국대학교병원에서 일했다. 2019년 2월 정년퇴직하고, 제주 올레, 고창과 통영의 길과 섬을 걸었다. 이후 해파랑길 750km를 걷기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1,470km의 남파랑길을 걷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