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노점상 이덕인 열사 27주기 추모제… “명백히 ‘국가폭력의 희생자”

[뉴스클레임] 27년 전 인천 아암도에서 유명을 달리한 장애인 노점상 이덕인씨를 아십니까?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28, 겨울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울 퇴계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 정문 앞에 백발의 노인이 눈물을 훔치고 있다. 그 뒤로 약 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995년 인천 아암도에서 의문의 사체로 발견된 한 청년을 추모하기 위해서다.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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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은 이덕인이고, 모인 사람들은 그를 '열사'라 불렀다.

우리 덕인이는 19671214일 전남 신안군에서 태어났으니 올해로 56살이 됩니다.”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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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에 따르면 어린 시절 소아마비를 앓았다고 전한다.

그가 의문의 죽임을 당한 1995년은 유독 장애인을 둘러싼 사건이 많았다. 봄에는 서울 서초지역에서 노점상을 하던 장애인 최정환 씨가 분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노점상과 장애인이 함께 장애인 자립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노점상이라도 해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취지였다.

이덕인도 6월부터 인천 아암도에서 노점을 시작했다. ‘총무직책을 맡으며 굴업도 핵폐기장 건설 반대 집회와 범민족 통일 대회에 참가하는 등 사회문제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단속과 차별이 구조적인 문제라는 것을 자각해 나갔다.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그의 꿈은 곧 물거품이 되었다. 그해 겨울 인천시와 연수구는 아암도 노점상 철거를 위해 수억 원의 예산을 편성했다.

상인들은 구름처럼 밀려오는 용역반을 피해 바닷가에 망루를 짓고 농성을 시작했다. 경찰과 용역은 내버려 두지 않았다. 물대포를 쏘아대며 해산을 종용했다.

망루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먹을 물과 음식이 떨어졌고, 젖은 몸 속을 바닷바람이 파고 들었다.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위험을 느낀 이덕인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 망루를 내려와 사라졌다. 그리고 사흘 후 싸늘한 시신이 되어 떠올랐다.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상의는 벗겨진 채였다. 두 손은 밧줄에 감겨 있었다. 타살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경찰은 다급해졌다. 인천 길병원 영안실에 공권력을 동원해 벽을 뚫고 시신을 탈취했다. 강제로 부검했고, 익사로 발표했다.

가족은 진상규명에 나섰다. 다행히 정부 수립 이후 국가에 의한 인권유린을 규명하기 위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였다, 2002년 이 기구는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린다.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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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의 공권력 동원과 통제로 헌법상의 생명권을 위협하고, 신체의 자유, 행복추구권을 과도하게 침해하여, 공익에 비해 침해되는 사익이 현저히 큰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였으며, 국민기본권의 확립을 위해 항거하는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렀으므로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한다.”였다.

가족과 동료들은 명예회복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다.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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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고 이명박 정권으로 바뀌었다. 2008, 이 사건은 기각되었다.

노점상 단속 행위는 기본적으로 지방자치단체의 고유사무이며 적법한 법을 집행하는 일반적인 행정행위에 속하므로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통치행위라고 할 수 없으므로 민주화 운동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는 것이었다.

가족과 동료들은 경악했다. 다시 기나긴 농성과 비탄의 세월을 보냈다.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문재인 정부 들어 20202진화위가 만들어지고, 사건에 대한 조사개시 결정이 다시 내려졌다.

이번에는 꼭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하겠다는 의지로 30여 개의 단체가 모여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공동대책위'에 참가하고 있는 빈곤사회연대 정성철은 말한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 14개월이 지난 후 뒤늦게 사건에 대한 조사개시를 결정한 것도 유감이지만, 그동안 유가족은 물론 신청인과의 특별한 소통이 없었습니다. 지금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상을 둘러싼 새로운 추가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사건 해석을 둘러싸고 어려움이 있다고 토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결정될지 걱정 됩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열사위원회 위원장 김병태씨는 세월이 흐르고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지금까지 명명백백 사건의 규명과 명예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아들의 원통한 죽음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27년 거리를 헤매야 했습니다.”며 울분을 토했다.

추모제에서 민주노점상전국연합 위원장 최영찬 씨는 “당시 무창 용역반의 악행은 지금도 철거민 노점상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옵니다이덕인 열사는 명백히 국가폭력의 희생자입니다라고 목소리 높여 규탄했다.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추모제에 참석한 사람들은 장애인이 선택한 마지막 생계 수단인 노점상에게 과도한 공권력 행사로 벌어진 사망 사건이라는 점을 오래전 국가도 인정했다. 사인을 둘러싼 진상규명 못지않게 민주화의 해석을 둘러싼 질문을 사회에 던진다고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이후 피해자에 대한 배상·보상법안 등 제도적 장치도 미흡하다. 이에 대해 '법인권사회연구소 대표 이창수'씨는 “국민 통합과 진정한 화해로 이어지지 못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후·보상특별법제정이 필요합니다"라는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 규명 통보를 받은 날로부터3년 안에 소송을 해야 한다그래야 구제를 받을 수 있다. 별도의 배·보상을 위한 법적인 장치가 없기에 개별적으로 소송을 하고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다.

제대로 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첩첩산중이다. 지금껏 유명을 달리한 이에 대한 진정한 추모는 무엇인가?

가난과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저항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인식할까?

노부모는 27년을 기다려 왔다눈물샘이 마를듯한데 어머니는 아들의 영정을 쓰다듬으며 또 눈물을 흘린다.

사진=최인기 빈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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