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리 해파랑길 해파랑길24코스(4)

[뉴스클레임]
4일 일정의 마지막 날 해파랑길24코스의 후반부 9km를 걸었다. 전 날 평해의 월송정을 바다 쪽에서 걸어 들어와 살피고 주차장에서 택시를 불러 숙소로 돌아간 탓에 월송정 입구는 살피지 못했다.
이날은 차를 월송정 주차장에 두고 출발해 해파랑길 24코스 걷기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기로 했다. 차를 두고 바로 출발하므로 비교적 이른 시간에 걷기를 시작할 수 있고 주변도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살펴볼 수 있다. 반면 차를 끝나는 지점에 두고 다시 월송정까지 택시를 타고와 걸어 나가면 차가 있는 곳에서 걷기를 끝내고 바로 집으로 출발할 수는 있지만 조금 늦은 시간에 걷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마음이 바쁘다.

월송정 일대는 바닷가의 얕은 구릉지대로 소나무 숲이 일품이다. 월송정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關東八景越松亭 (관동팔경월송정) 현판을 달고 있는 웅장한 대문이 있고 이 대문을 들어서면 울창한 소나무 숲이 반긴다. 숲속에 잘 관리되고 있는 건물은 ’평해황씨시조‘를 모신 사당이다.

월송정 안내판을 다시 읽고 돌아보다가 잘 다듬은 검은 돌에 새겨진 월송정 중건비를 발견했다. 정자의 중건기는 통상 정자 안에 편액으로 달아 두는데 월송정은 입구에 돌 비석으로 세운 것이 조금 색다르게 보였다.
조선 중종 때 창건했고, 일제강점기 1933년에 고을 선비들이 중건했으며, 광복 후에 재일교포의 후원으로 다시 지었으나 건축양식이 어울리지 않아 1979년 12월 19일에 착공해 1980년 7월 29일에 준공했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을 작시한 노산 이은상 선생이 글을 쓰고 서예가 일중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썼다. 존경받는 시인과 당대 최고 서예가의 합작품이다. 정자가 다시 지어지던 시기는 나라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던 시기였으나 당시 대통령의 글씨로 월송정 현판을 달았으니 그 과정이 조금 궁금했다.

월송정을 품고 있는 숲을 북쪽으로 벗어났다. 바다로 흘러드는 강물이 고요해서 거울처럼 솔숲이 비친다. 다리를 건너면 백사장과 그 배후의 방풍림이 좋은 구산해수욕장이다. 해파랑길 표식이 해수욕장 밖의 도로로 안내한다. 군 시설 이전을 결사반대한다는 현수막이 길가에 보이고 하늘 높이 비행기 나는 소리가 시끄럽다.

‘독도생태마당’이라 소개하고 있는 작은 공원이 방풍림 뒤에 조성되어 있고 이제는 사라진 독도강치 모형과 옛 군사 동상들이 보인다. 구산항 근처에 구산어촌체험휴양마을이라는 간판이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코로나가 지배하고 있던 시절이어서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항구 가장자리 빈터에 조성된 대형 독도모형이 눈길을 끈다. 그 건너편에 대풍헌과 수토문화전시관이 있다. 대풍헌은 말하자면 바람을 기다리는 집이다. 이곳에서 수토사 일행이 배를 타고 울릉도에 가서 몰래 그곳에 가 살고 있는 주민들을 단속해 다시 육지로 데려왔다.

조선은 건국 이후 세 번째 왕인 태종 때부터 조선 말 1882년 고종 때 울릉도 개척명령이 있기 전까지 백성들이 섬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고 출입마저 금하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실시했다.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부터 섬에 사는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은 끊임없이 울릉도와 독도를 왕래하며 어로활동을 하거나 몰래 정착해 농사를 짓곤 했다. 수토사는 2~3년에 한 번씩 파견되었다. 대풍헌과 한 마당을 쓰고 있는 수토문화전시관에서 많은 이야기를 읽어볼 수 있다.
왜구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는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목적만을 위한 정책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구산항을 돌아 나갔다. 길을 내느라 산자락이 잘린 탓에 길옆에 붙어 바닷가에 나앉은 바위가 멋지다.
바위를 돌아서자 작은 공원이 있고 소박한 정자와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두어 시간 걸었으니 쉬어가기로 했다. 버스정류장에 ‘갈매’라 표기되어 있으니 사람들은 갈매마을이라 부를 것이나 행정구역 명칭은 봉산리다.

길 건너 산자락 깎여나간 곳에 비석과 바위벽에 박혀 있는 검은 돌판이 눈에 들어왔다. 백암 김제 (白巖 金濟) 선생과 그의 아우 농암 김주 (籠巖 金澍) 선생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백암 선생은 선산 김 씨로 이곳 평해군수로 있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었다는 소식에 시를 한 수 남기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명에 사절로 갔던 농암 선생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에 이르러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옷과 신발을 편지와 함께 집으로 보낸 후 발길을 돌려 중국의 남쪽 형조 (荊楚)땅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백암 선생이 남긴 시 중 ‘노련진 (魯連津)의 뜻을 알아보려 검색해 보니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인물인 노중연 (魯仲連)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역시 한시는 쉽지 않다.
글쓴이 오근식=1958년에 태어나 철도청 공무원, 인제대학교백병원 그리고 건국대학교병원에서 일했다. 2019년 2월 정년퇴직하고, 제주 올레, 고창과 통영의 길과 섬을 걸었다. 이후 해파랑길 750km를 걷기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1,470km의 남파랑길을 걷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