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48코스

[뉴스클레임]
해파랑길48코스는 고성의 가진항을 출발해, 동해로 흘러드는 남천과 북천을 건너고, 반암항을 지나 거진항에서 끝나는 약 14km의 길이다. 옛 양양-원산 철도의 북천철교 외에는 특별히 기억에 담아 둘 만한 이야기 찾기가 쉽지 않은 길이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던 날 하늘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길이 오르고 내림 없이 평이하고 거리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아 11시가 가까운 시간에 출발지인 가진항에 도착했다. ‘평일에도 관광객이 붐빌 정도로 싱싱한 활어회를 자랑하는 가진 활어회센터’라는 소개 글을 읽고 주차 걱정을 했다. 그러나 깔끔하게 콘크리트 포장이 되어 있는 주차장은, 점심시간이 멀지 않았지만, 텅 비어 있었다.
2년 전 부산에서 걷기를 시작한 후 내내 길에서 사람 만나기 어려웠는데, 여전히 가는 곳마다 코로나19의 짙은 그림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횟집 주인들의 보이지 않는 눈길을 애써 모른 체하고 길을 나섰다.

하늘은 더는 짙어질 수 없을 만큼의 푸르름을 쏟아내고 있었다. 정말 구름 한 점 없었다. 하늘에서 볼거리를 찾을 수 없으니 길가 어느 집 담장 곁의 붉은 산사나무 열매, 커다란 돌 틈에 자리를 잡고 그 틈의 모양에 맞추어 늙어버린 호박 그리고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을 살피며 걸었다.

남천을 건너며 서쪽을 바라보니 산줄기가 아득히 멀다. 저기 보이지 않는 골짜기 골짜기에서 흐르기 시작해 모인 물들이 이제 바다가 되고 있다. 바다에서 모래를 끝없이 밀어 올리고 있어 쉽게 나가지는 못하고 머물며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산과 내와 바다가 모두 하늘의 푸른색에 물든 듯했다.

다리를 건너면 동호리 해변이다. 이 외진 해변에, 그것도 10월 중순이 지나고 있는 때에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동호리 주변 마을의 유래에 관한 안내 글을 읽고는 다시 걷는다. 길이 바다를 벗어난다. 방풍림 뒤에서 만난 논이 평야까지는 아니지만, 제법 넓다.
길가에 가끔 산국이 보인다. 너무 많이 피지 않고, 너무 벌어지지 않은 꽃송이를 골라 따서 주머니에 넣었다. 깨끗한 물에 씻고, 찜기에 넣어 가볍게 쪄서 말리면 제법 괜찮은 국화차가 된다. 마른 후에는 한 줌도 되지 않지만, 오래 두고 찻잔에서 다시 피어나는 국화 향을 즐길 수 있다.

북천을 건너는 다리 앞에 섰다. 북천철교는 일제강점기에 건설되었던 동해북부선 (양양-원산)의 일부였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 중 북한군이 이 철길을 통해 군수물자를 수송하게 되자 아군이 이 철교를 폭파했다. 이후 60여 년간 교각만 방치되어 있다가 2011년 걷기와 자전거 탐방객들을 위한 다리로 재건되었다.
동해북부선은 남북 간 철도 연결이 추진되며 2007년 5월 17일 제진과 북한의 감호 구간을 연결해 시범운행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다시 단절되었다.

북천철교를 건너 다시 바닷가에 서니 멀리 거진항이 보인다. 이제는 해변의 백사장을 옆에 두고 걷는다. 반암해변은 아담하다. 인근에 반암항이 있는데 더는 고기잡이배가 드나드는 항구는 아닌 듯했다. 해변 가까이 바다 위에 낚시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특별한 준비 없어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바다낚시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시설이다. 고기잡이가 아니라 관광이 주 업종이다.

거진항이 가까워질수록 제법 규모가 큰 시가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철이 되면 항구에 넘쳐나던 명태와 오징어에 기대어 그 배후 도시의 인구가 25,000명에 이르렀던 희미한 옛 모습이 아직 남아 있다. 여전히 해마다 10월이면 고성군 명태축제가 거진항에서 개최되며 반백 년 전의 호황기를 추억한다. 이제는 문어와 홍게 등이 주 어종이 되었다. 좋았던 그 시절이 다시 올 수 있을까.

글쓴이 오근식=1958년에 태어나 철도청 공무원, 인제대학교백병원 그리고 건국대학교병원에서 일했다. 2019년 2월 정년퇴직하고, 제주 올레, 고창과 통영의 길과 섬을 걸었다. 이후 해파랑길 750km를 걷기 여행을 마치고 현재는 1,470km의 남파랑길을 걷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