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심에 관하여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사방이 온통 시뻘겋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있는 것은 물론, 벽면, 심지어 천정까지도 빨간 피가 뿌려져 있다. 또 한 차례 싸움이 벌어진 언덕의 곳곳에서도 핏자국은 선명했다. 순간적으로 나는 잠시 망연해졌다. 칼들이 난무하는 싸움 도중 우연히 고개를 돌려 바라본 푸른 바다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바다의 색상이 이토록 곱다니.”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꿈속에서의 일은 현실보다 강력하게 다가온다. 현실에서 보지 못하는 삶의 부문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꿈이다. 내가 피를 흘리는 꿈을 꾼 것은 처음이었다. 도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누군들 하겠지만, 싸움을 즐겨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사는 것 자체가 싸움이고, 그 싸움에서 이기는데 결사적이다. 그런데 나는 남들과 달리 살아왔다. 삶이 싸움터라면 나는 패잔병에 불과했다. 싸움터에 끌려와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치는 졸병이다. 나는 궁금하다.

‘나는 왜 싸움을 잘하지 못했을까?’

그것은 쉽게 흥분하고 덤벼드는 성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불 가리지 않고, 싸움에 매번 끼어들었다가 된통 당하는 못난이 병졸이다. 지난날의 싸움은 그렇다 하더라도, 앞으로 삶의 전쟁터에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싸움꾼이라는 말은 내가 붙인 말이다. ‘외식업계의 싸움꾼’ 김동현 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20여 년 전 찜질방에서였다. 그는 반년 가까이 찜질방을 전전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그때 그의 눈 속에서 어떤 갈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 강렬한 갈망은 매 순간 숨소리에 묻혀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그는 넉살 좋게 자신의 상황을 표현했다.

“빚쟁이들이 새벽 2시에 사는 집 창문을 두들겨요.”

이후에도 여러 번 사업의 우여곡절을 겪었던 그가 최근에는 바빠졌다. 사업에 탄력이 붙은 것이다. 한번 좌초한 사업을 일으키기는 쉽지 않다는 것을 주변에서 수없이 봐왔기에, 그의 진도는 놀라운 일이었다. 더욱이 그의 나이는 사업 재개하기에는 적지 않은 나이였다.

얼마 전 그를 다시 만나고 나서야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쓰는 말투에서 드러났다. 

“그 일은 내 것이 아니지요.”

낯선 말투였다. 어떻게 해서든 사업권을 따내려고 발버둥 치던 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생각해보니 그에게는 지난 5, 6년이 숨어 있었다. 그는 그 기간 사람들을 피해 다녔다. 패배의 기억이 그를 도망자로 만들어버렸다고도 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 기간은 자기편에서 바라보는 시선의 소멸 기간이었다. 욕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나오는 판단력이 사업을 패배로 몰아놓았다는 통렬한 반성 끝에 그가 선택한 ‘은둔’이라는 말이다.

“그저 조용히 떠나있었지요.”

은둔에서 돌아온 요즘 그는 완연히 달라졌다. 이익 불사의 세태에 어울리지 않게, 기회가 오더라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상황에 맞지 않으면 스스로 이익을 포기했다. 수익이 높은 일 앞에서도 그는 돌아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아이러니하게도 ‘내 일이 아닌 감네’ 하는 김동현 대표에게 오히려 일이 몰리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주말 가릴 것도 없이 동분서주하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목계의 덕목이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장자의 우화에서 최고의 싸움닭은 목계(木鷄)이다. 나무로 만든 닭(목계)의 가장 큰 덕목은 작은 일에 흔들림 없다는 것이다. 장자는 우화에서 선왕이 닭싸움 붙여도 되겠냐고 묻자, 기성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연히 목계가 되기 이전의 닭을 두고 하는 말이다.

“아직 안됩니다. 괜히 허세를 부리며 제 기운만 믿고 있습니다.”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근래의 일이다. 삶이 주는 고통에 오랫동안 시달리면서부터이다. 내가 스스로 약한 병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통은 현실과 생각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 그 간격이 클수록 고통의 크기도 커진다. 고통이 크다는 것은 삶이 내가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나의 생각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에 문제가 많다는 말이다.

생각을 바꾸는 것은 불편한 현실이다. 불편한 현실은 내면의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이 지점이 바로 저항이 탄생하는 지점이다. 내면의 저항을 억누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깨어 있는 의식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잠들어 있는 의식으로는 저항의 탄생을 막을 수가 없다. 근본적인 문제는 예전에는 나에게 이 진리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문제를 알았다면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저항하지 않기이다. 내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불편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답은 간단하나, 실행하기는 쉽지 않다. 고도의 수행, 영적 행위인 종교적인 수행이 요구될 것이다. 그것도 상당 기간. 

언제라도 좋으니 나는 장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싶다. 이번 생애가 아니더라도 좋다. 장자가 내게 말한다.

“이제는 되었습니다. 다른 닭이 우는 소리를 내도 전혀 움직임이 없습니다.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바라보니 마치 목계 같습니다.”

또다시 꿈을 꾼다.

나는 전생에 한 번쯤은 최고의 전사로 살아봤나 보다. 모든 적을 물리치고 피에 물든 칼을 쥐고서 허탈하게 전장에서 서 있는 전사의 모습이 그려진다. 꿈의 싸움의 뒤끝은 언제나 허망하다. 이번 꿈이 그러하다.

‘자리에 길게 누워있는 나를 내려다보였다. 몸뚱어리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나의 손길에 따라 흔들거릴 뿐,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나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게 터무니없이 가려고 아등바등 살아보려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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