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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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클레임]  고구려는 영토만 광활한 게 아니었다. 바다도 완벽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648, 군사 원조를 얻으러 당나라에 갔던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귀국 중이라는 정보가 고구려 수군(水軍)에 입수되었다. 고구려는 즉시 김춘추 체포에 나섰다.

김춘추는 부하 온군해(溫君解)와 부랴부랴 옷을 바꿔 입었다. 고구려의 순라병(邏兵)은 온군해를 김춘추로 착각했다. 그 사이에 김춘추는 작은 배로 옮겨 타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진덕여왕은 온군해에게 대아찬(大阿飡) 벼슬을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상을 내렸다.

수나라 문제(文帝)는 고구려를 정복하겠다고 30만 대군을 출병시켰다. 하지만 국경인 임유관(臨渝關)도 제대로 넘지 못하고 참패당하고 말았다. 수군의 경우는 사실상 전멸이었다.

수나라는 그러고도 패배 사실을 희한하게 감췄다. 이른바 춘추필법이다.

양량(楊諒)의 군사는 장마와 전염병을 만나고, 주라후(周羅候)의 수군은 풍랑을 만났다. 그 바람에 돌아오지 못한 군사가 열 명 중 아홉 명이었다.”

광개토대왕이 해양대국백제를 공격할 때는 5만 명의 수군을 동원하고 있었다. 남조 송나라에 말 800마리를 한꺼번에 보낼 정도로 많은 함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렇게 막강했던 수군이 조선 말에는 어땠을까.

대원군은 미국 군함을 본떠서 철갑함을 만들도록 했다. 어렵게 만들었지만, 숯을 때서 내뿜는 증기의 힘으로는 함선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결국, 해체해서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무기고에 보관해왔던 구리와 쇠도 바닥이 났다.

함선이 완성되자 대원군은 진수식을 직접 참관했다. 백성도 많이 모여서 구경했다. 하지만 배는 ‘1분에 기껏 열 발짝을 움직일 정도로 느렸다. 실패작이었다. 이순신 장군에게 부끄러울 노릇이었다.

조선 말 무렵에는 아예 바다를 비우자는 공도(空島) 정책을 폈다. 연안을 통과하는 서양 선박인 이양선(異樣船)의 눈에 띄면 침략 야욕을 자극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야간에는 바닷가에서 불빛이 새는 것까지 조심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바다를 포기했으니 조선술도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원양 항해에 적합한 첨저선(尖底船)의 제작이 금지되고, 연안 항해나 할 수 있는 평저선(平底船)만 남게 되었다.

미국과 합의한 팩트 시트핵추진잠수함 건조 승인이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돌이켜보는 고구려 수군이다.

보도에 따르면, 핵추진잠수함은 작전 수행능력이 탁월하다고 했다. 연료의 보급 없이 장기간 수중 작전을 펼 수 있고, 적에게 탐지될 확률도 낮다고 했다. 우리 해군의 작전 반경을 획기적으로 넓혀줄 뿐 아니라,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한 억지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유사시에는 북한의 주요 시설을 타격하는 전략 자산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주변국에 대한 견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얻는 게 있으니 주는 게 없을 수 없다. 국방비 지출을 GDP3.5%로 늘리기로 한 것과 관련, 미국은 우리를 모범적인 동맹국(model ally)’이라고 추켜올렸다고 헸디.

아직 미해결인 잠수함 건조 장소를 놓고 힘을 합쳐야 할 텐데, 정치판은 국익 시트’, ‘백지 시트라며 싸움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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