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클레임]
1946년 3월 1일. 광복 후 첫 3·1절이 돌아왔다. 대대적인 행사를 열어 기념할 만한 날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이날, 우익은 이승만, 김구, 군정사령관 하지 장군 등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보신각광장에서 기념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동대문 옆 서울운동장에서 시민대회를 열었다.
좌익은 보신각광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파고다공원에서 기념식을 가진 뒤, 남산공원에서 시민대회를 열었다.
광복 후 첫 3·1절의 행사는 이렇게 ‘따로따로’ 열리고 말았다.
두 달 후의 ‘메이데이 행사’도 그랬다.
우익은 서울운동장 육상경기장에서 행사를 개최했다. 좌익도 서울운동장에서 행사를 열기는 했다. 그렇지만 경기장이 달랐다. 육상경기장이 아닌 야구경기장이었다.
육상경기장 행사에는 3000명이 모였다. 반면 야구경기장에는 3만 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좌익은 동원능력이 우익보다 높았다.
광복 후 처음 맞는 8월 15일의 광복절 경축행사도 다를 수 없었다.
우익은 ‘군정청’ 광장에서, 좌익은 서울운동장에서 따로따로 행사를 개최했다. ‘외국인’인 하지 장군의 눈에도 좀 껄끄럽게 보였던지, 한마디 던졌다.
“제2회 광복절 기념식은 ‘통일된’ 한국정부 밑에서 경축할 수 있기를 열망합니다.”
이듬해인 1947년 3월 1일에는 더욱 심했다.
우익은 서울운동장에서, 좌익은 남산공원에서 각각 행사를 치렀다. 행사를 마친 후 시가행진을 하다가 좌익과 우익이 남대문과 서울역 중간지점에서 마주쳤다.
언성이 높아지고 삿대질이 오가더니 급기야는 패싸움으로 번졌다. 총소리까지 울렸다. ‘유혈 충돌’이 벌어진 것이다.
이승만이 기자회견을 열고 좌익을 비난했다.
“애국자와 매국자가 어떻게 같은 길을 갈 수 있겠는가.”
좌익이 곧바로 그 말을 받았다.
“이승만과 김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늙은일 뿐이다.”
지금, 아주 ‘닮은꼴’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 ‘따로따로 행사’가 ‘재탕’되는 현상이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독립기념관장 임명을 철회하지 않으면 정부의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그러면서 광복회를 비롯한 독립운동 관련 단체가 모인 독립운동단체연합은 자체 광복절 기념식을 열 계획이라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도 정부의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먹고살기 힘든 국민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고 지적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다. 이념 논쟁 탓인 듯했다. 그래서인지 이 회장은 윤 대통령이 초청한 독립유공자 후손 초청 오찬애도 불참했다는 소식이다.
민주당은 원색적인 표현으로 비판하고 있다. ‘역사 쿠데타 세력’, ‘밀정 정권’이라고 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의 경우는 “밀정을 국가 요직에 임명하는 자가 왕초 밀정”이라고도 했다. 결국, 광복절 경축은 ‘반쪽 행사’다. 국론은 따라서 조각나고 있다. 앙금을 남길 것이다.
광복 직후면 얼추 70년 전이다. 20세기다. 21세기 대한민국의 나라 꼴이 마치 70년 전으로 역진하는 모양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