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클레임]
첫 총리직과 주미대사를 역임하고 공직에서 물러난 뒤 2012년부터 3년간 무역협회장으로 재직하며 받은 급여 19억5000만원과 퇴직금 4억원, 2017년부터 5년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서 고문으로 재직하며 받은 보수 18억원, 2021년 1년간 에스오일 사외이사로 재직하며 받은 보수 8000만원 등 퇴직 전관 자격으로 총합 42억3000만원의 재산을 불렸다. 이렇게 전관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다 윤석열 총리 제안을 수락해 공직으로 다시 복귀했다.(수치 주간경향1628호 발췌)

누구 이야기일까? 맞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한덕수씨다. 이런 상황에서 상층부 누구도 전관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다 다시 공직에 복귀하는 것이 관료로서 부절적한 처신이 아니냐는 말을 하지 않았다. 또 12.3 계엄선포를 막지 않은 것에 어떤 책임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윤석열 탄핵 뒤 권한대행직을 수행하다 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국민만 바로보고 나왔다"며 사퇴하고 국힘에 입당했다.
"자신이 해고된 서울 명동의 세종호텔 앞 철제 구조물에 올라 지난 13일 90일째 아침을 맞는 고진수(52) 씨. 그는 세종호텔에서 일식 조리사로 20년간 일했다. 코로나19 유행 2년이 다 돼가던 2021년 연말 해고됐는데, 막바지에 그가 받은 월급은 230만원이었다. 경력 10년, 20년 되는 사람들이 임금은 10년 전 수준으로 받는다. 그런데 누구도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다. 현재 호텔업계는 코로나19 당시의 충격을 극복했다. 팬더믹 직전인 2019년 서울 지역 호텔의 객실 매출액은 9814억원이었는데, 코로나19 이후인 2023년에는 객실 매출액이 2조1648억원까지 뛰었다.
그러나 총매출액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9년 서울 호텔 평균 33.36%에서 2023년 17.17%로 반 토막이 났다(한국호텔협회 운영현황) 재난을 이유로 인력을 줄이고 노동조건을 후퇴시키고는, 재난을 극복한 후에도 조여 맨 허리띠를 풀지 않고 있다. 일하는 사람의 몫은 적어지고 회사는 더 많은 이익을 가져간다.(서울 명동 세종호텔 앞 고공농장 1박 2일 취재기 中)
한덕수씨가 정부 고위관료와 자본의 요직을 거치두면서 쓸어 담은 저 끔찍한 수치(난 저것이 임금으로 와 닿지 않는다)는 오늘날 땅에서 살지 못하고 고공에서 위태롭게 나부끼고 있는 사람들의 목숨줄에서 나왔다.
어떤 이가 내게 말했다. 어떻게 당신의 결론은 모두 사회구조의 문제로 끝나느냐? 그럼 사적 개인의 문제는 없는 것이냐? 라고 반문했다. 그의 질문은 매우 정곡을 찌르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개인 생활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개인과 가정이 사적인 세계로 후퇴한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다양성, 개인의 취향… 즉 특정한 라이프 스타일을 선택하고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장 공평하게 제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 예로 패션, 요리, 휴가, 정원 가꾸기, 맛집 소개를 다루는 털레비전 프로그램이 하루 동일 방영 된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내가 그것을 누릴 수 없을지라도 그 기회는 항상 열려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고 실제 그것을 누릴 수 없을 지라도 그 원인은 개인의 능력 탓으로 돌리고 체념하게 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이건 이데올로기다. 이데올로기 중에 굉장히 고약한 이데올로기가 이런 개개인의 능력에 모든 것을 미뤄 버리는 것이다. 어떤 사회적 '착취'와 '소외'도 '니 능력의 문제다' 라고 만들어 버리면 착취와 차별에 맞서는 투쟁은 개별 투쟁에서 동력을 얻어 사회 전체를 변화 시키려는 최상의 투쟁으로 나가는 길이 차단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나 권력층은 '개개인의 능력에 모든 것을 미뤄 버리는'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업그레이드 시켜서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럼 이 개개인들이 가질 수 있는 '몫'의 차이. 즉 '계급분열'의 원인이 어디에서 오느냐?
계급은 어느 순간에 분열된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태어날 때마다 사람의 출생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가 어떠냐에 따라 90프로 결정되어 버린다. 물론 가끔 개천에서 용나서 계급 상승을 꾀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모순이 이렇게 격화되기 전 시기에 나타날 수 있다. 우리나리의 경우 7.80년대에 해당 된다. 지금처럼 자본주의 모순이 격화된 경우에는 계급은 세습되이 버린다.
이를테면 의사, 변호사, 교수, 고위 공무원, 주요 언론사 기자 그리고 대표적 재벌 기업의 정규직 등 '좋은 직업'을 두고 벌이는 경쟁과 소위 명문대를 향한 학벌과 상징투쟁은 중첩 구조화 되고 있고, 그 경쟁에는 아무나 낄 수 없다. 소위 그들만의 리그인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사회 부조리를 상층 개인의 탐욕과 하층 개인의 무능력으로 돌리면서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운영상의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진단하고 비판한다.
여기에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인문학이다.
특정 기업이 아동을 착취하고, 다른 회사는 환경을 파괴하고, 특정 은행은 투기를 하고 있다고 연일 나온다. 그럼에도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보다는 자본가는 탐욕스럽다는 해석만이 나온다. 사람만 탓하고,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무능을 탓하고 또는 경쟁에서 이긴 탐욕과 부패만 탓하는 바람에 자본주의 시스템은 보호 받고 개인은 소외감에 빠지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우린 뼛속까지 자본주의에 빠져 살고 있다. 말로는 자본주의를 성토하지만 속으로는, '자본주의 말고 뭔가 있어?' 생각한다. 세계 종말은 상상할 수 있지만 자본주의 종말 이후는 상상하기 힘든 것이다. 그럼 우린 이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지겹게 이 사회구조를 말하고 여기에 반기를 들고 투쟁하는 모든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이 상상력이 죽을 때 개인의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