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클레임]

내일이 투표일이다. 조기 대선기간 동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쓴 모든 글은 '여기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40년의 대의민주주의의 허약함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신자유주의는 정치가 돈과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을 굳이 숨기지 않는다. 시장과 자유를 등치시키면서 시장의 '독재'를 민주주의로 호도하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시장에 결코 수응할 수도, 같이 할 수도 없는사람의 절규만이 이 신자유주의의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 고 외치는 절규

 

: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여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소년이 온다 중에서)

2009년 오늘 일어났던 용산참사. 그날 이후 많은 일이 있었다. 박근혜 탄핵 구속된 후 용산참사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도 구속됐다. 그럼 세상은 좋아진 것일까? 2009년 그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과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은 이들의 고통은 지나간 옛일이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망루 끝에 내몰려 불시에 삶을 중지당한 망자들의 죽음은 결코 돌이킬 수 없다. 그들에게는 불운했던 그 시대의 사건처럼 보이는 일들은 그 무엇으로도 해소되거나 치유될 수 없는 폭력이다.

용산참사 당시 모습. 사진=뉴스클레임DB
용산참사 당시 모습. 사진=뉴스클레임DB

달라진 세상에서 다시는 그런 일이, 다시는 그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런 야만의 시대와 결별한 새로운 사회적 연대와 저항의 방법을 아직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불타는 망루는 현재적 폭력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용산구청장 박장규는 용산참사 후, 망루 생존자들이 감옥에 수감 돼 있고, 목숨을 잃은 철거민들이 순천향병원 냉동고에 누워 있던 2009년 7월 신계동 재개발 신축아파트를 측근에게 헐값으로 분양할 것을 압박했다.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진영은 용산 참사 이후 개발사업이 지지부진했던 2014년 부인 명의로 남일당 터 인근 토지를 사들였다. 헐갑(공시지가의 반값)에 사들인 땅에는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가 들어서게 되면서 개발이 진행, 10억에 산 땅은 32억 분양권이 됐다.(공직자 재산분석 - 용산 4선의원 진영 용산땅 10억에 사 32억 분양권) 진영이 사들여 이렇게 돈을 끌어 모은 이 땅이 어떤 땅인가? 용산 4구역 개발속도전과 참사의 배경이 된 '한강르네상스 - 용샤역세권' 개발사업은 서울시가 주도한 대규모 투기개발사업의 결정판이었다.

이렇게 다수 혹은 강자의 사익 증대가 곧 공익이라는 믿음은 이제 한국 사회의 상식이다. 

용산구청장 박장규나 더불어민주당 진영 의원 같은 자들의 눈에 땅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환한 투기의 대상이지만, 그 땅 위에 발붙인 사람들의 치열하고 복잡한 일상은 그저 골치 아픈 문제였을 뿐이다. 즉 이 땅 위에 밭붙인 사람들은 협상의 걸림돌일 뿐이었다.

그 걸림돌 즉 세입자 원주민과의 복잡한 협상과 기나긴 잡음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합리적인 방법이 폭력(공권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공권력을 사용하며 모두의 미래 이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폭력이고 작은 희생일 뿐이라고 말했다. 허나 진실은 몫 없는 사람들의 몫을 자본과 권력자가 결탁해 모두 쓸어 담는 모든 행위였고, 몫 없는 자들을 지독히도 많이 죽이고 사라지게 하는 폭력이었다.  

그날 망루에 남아 불에 타 죽은 사람들은 땅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승산이 없는 곳에서, 희망이 없는 곳에서, 풀처럼 쓰러졌다.

이렇게 쓰러진 자들을 기억하고, 그 죽음이 현재를 위한 삶이었다고 명명해주며 다시 풀처럼 일어서야 하는 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결코 폭력에 넘어진 모든 풀뿌리들이 과거가 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작가 한강은 '소년이 온다' 에필로그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억서 망루가 붙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됫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많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됐다. 덧나고 폭발해 피투성이가 재거됐다."

작가 한강의 말처럼.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그런데, 할 말은 하겠다며 이 현재적 폭력을 '어쩔 수 없는' 사고로 발전을 위한 부수적인 피해로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의 법 시스템에 의해 죽어갔던 그 자리에는 과연 무엇이 서 있길래 불에 사람이 타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사고로 그렇게 죽어도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도대체 이런 한국적 사고는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절망을 넘어 이 시대가 공포로 다가온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인간의 절규가 이렇게 파편화 되어도 정말 괜찮은 것인가?

불타는 망루에서, 침몰하는 배에서, 광주 전남도청에서 마지막 저항자들이 계엄군에 의해 사살되며,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피해자들이 자신의 상처를 증거로 법정에서, " 여기 사람이 있다" 고 외치는 절규를 지나간 어쩔 수 없는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며 외면하는 야만을 묵인하고는 우리의 미래는 커녕 현재도 결코 온전할 수 없다.

사람들이 이제 지나간 '과거'일 뿐이라고 말하는 폭력이, 희생자와 피해자들에겐 아직도 불타는 망루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 고 외치는 현재적 폭력임을 사회가 수렴해야 한다. 어떤 이유와 명분 이전에 이 사회 구조와 제도가(그 이전 사회도 포함) 무고한 사람을 핍박했고 이로써 인간이 죽거나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희생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럼 그 수렴된 사회의 기억 속에서 희생자와 피해자들은 우리에게 말 할 것이다. 폭력에 대한 진상을 계속 규명하지 않는 것은 희생자와 피해자에 대한 추가적인 폭력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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