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결혼식의 하루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눈가를 살살 간지럽히는 그 무엇이 있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창가를 통해 방안으로 몰래 스며든 햇살이었다. 햇살이 감미롭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꼈다. 민감해진 내 감각은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진작에 깨어있었지만, 한참 동안을 눈을 감은 채 그대로 있었다. 

전날 밤,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구도 만나지 않고 잠이 들었다는 것, 그것도 차분한 마음 상태로 잠자리에 들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일찍 퇴근한 후 책을 뒤적거리다가 밤 10시쯤 잠이 들었다. 방안에 널브러진 이불을 개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날이구나.”

10시, 집을 나섰다. 북부시장 입구로 들어섰다. 북부시장은 강북구 수유리에 있는 조그만 골목 시장이다. 평일 아침나절이라서인지 사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골목 시장길을 걸으면서 하나하나 가게 간판을 쳐다봤다. 약국을 지나 비디오가게 미장원 침술원 이발소 슈퍼 과일가게 분식점 목욕탕 앞을 지났다. 이제 조금만 걸으면 대로변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시간이 정지된 골목 시장 그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을 것만 같았다.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했다. 나를 찾을 이유는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삶은 항상 내게 신랄했다.

세상은 나를 불필요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경계인, 주변인, 기껏해야 연극무대에서 지나가는 사람으로만 여긴다. 아무도 나를 발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 역시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다.

골목 시장을 벗어나면서 시장 옆길에 있는 금은방을 흘깃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등 여타 보석은 아니고, 익히 알려진 금은만 취급할 것 같은 조그만 금은방이었다. 그러니까 5일 전쯤, 나는 그곳에서 금반지 2개를 그곳에서 맞췄었다. 실금 방지였다.

골목을 벗어나 사거리를 지나면 화계 유치원이 있다. 화계 유치원은 이 지역에서는 잘 알려진 유치원이다. 유치원 울타리를 붙잡고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무표정에는 사실 여러 복잡한 감정을 감추고 있다. 복잡한 감정이란 안타까움, 부러움, 두려움, 절망 그리고 미약하지만 실낱같은 희망을 말한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난날의 삶에서 온몸으로 익혔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유치원 옆으로는 헌책방이 있다. 책방 아저씨가 책들을 도로변에 진열하고 있었다. ‘불모지대’라는 일본 대하 시리즈 소설전집이 눈에 띄었다. 군대 시절에 읽고서는 다시 한번 읽고 싶은 생각이 든 소설이었다. 2차대전 전쟁포로인 주인공의 수용소 생활부터 그려져 있다.

그보다 훨씬 내게 강력한 충격을 주었던 작품인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츠의 하루’도 군시절에 읽었었다. 하루 동안의 시베리아수용소 생활을 묘사한 작품이다. 읽는 내내 불안과 공포, 그리고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주인공의 안도감에 그대로 이입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이반 데니소비츠의 하루’의 소설 내용을 반추하다보니, 나는 과연 내 삶을 ‘사랑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갑자기 훅 들어왔다. 이 소설과 관련이 있을법한 19세기 러시아 문호의 시구가 덩달아 떠올랐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가고자 하는 곳은 며칠 전 우연히 찾은 이발소였다. 이발소 출입문에는 ‘신랑화장’이라는 종이 딱지가 새롭게 붙어 있었다.

미장원의 ‘신부화장’을 본떠서 이발소가 ‘신랑화장’을 영업스킬로 선택한 모양이다. 허나 뜬금없는 문구였다. 뜬금없다는 말은 근처에 있는 예식장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더구나 이 이발소는 수유 재래시장 입구 쪽 골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10시 반, 나는 이발소에 들어섰다. 종업원의 반응을 보니, ‘신랑화장’ 마케팅 이후 내가 첫 손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업원 중 하나가 상냥하게 물었다. 평일 날, 신랑화장을 하는 내가 궁금한가 보다. 오늘 같은 날, 감정이 침해되기 싫어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거울을 응시했다. 그저 무표정의 얼굴로 화장으로 변해가는 나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만 보았다.

11시 40분, 이발소를 나섰다. 햇살은 여전히 부드럽게 나를 건드렸다. 가볍게 어깨에 쌓인 햇살을 털어내면서 수유 시장을 거쳐 미아역까지 걸어갔다. 

역사 안에서 떠나는 지하철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객차를 몇 번 보내고 나서야 지하철에 올라탔다.

12시 10분, 평일 한가한 시간대라서 그런지 군데군데 빈 자리가 보였다. 굳이 앉고 싶지 않았다. 왠지 그냥 그래야만 될 것 같았다. 되도록 승객이 드문 곳에 외따로 서서 차창 밖을 응시했다. 밖이 보일 리가 없는데도, 내릴 때까지 줄곧 그 자세를 유지했다. 도착한 곳은 건대입구역이었다. 건대입구역에는 오가는 승객들이 제법 많았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올라오는 승객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저들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일까?”

12시 40분, 시간을 확인하고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싱그러운 바람이 스쳐 간다. 봄날의 부드러운 바람을 만끽하면서 걸었다. 거리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하나하나 눈에 담아두었다. 1시를 조금 넘겨서 화양리를 거쳐 어린이대공원 정문에 도착했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다. 잠시 후면 이곳 풀밭에서 야외결혼식이 벌어진다. 결혼식을 평일인 수요일 오후 2시 30분으로 잡은 것은 나를 아는 사람들이 결혼식에 찾아오는 것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사람들을 초청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물론, 직장동료들도 결혼식에 오는 것을 나는 거부했다. 결혼식에 오가는 것으로 인간관계를 과대평가할 만큼 나는 어리석지 않다. 

사람들의 호의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나는 어차피 이방인이었다. 생존을 위한 삶은 내게는 시시한 일이었다. 생존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그들 속으로 뛰어들지 않는 나는 영원한 경계인, 즉 소외된 자였다.

전날 오후 3시 정각에 맞춰, 휴가신청을 냈다. 편집국장의 반응은 예상한 바 그대로였다. 국장의 불호령을 들으면서도 나는 덤덤했다. 

관습에 의해 결정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관습은 통속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통속성은 항상 민감하지 못하다. 나는 민감하지 못한 삶을 무척 혐오했다.

관습은 우리를 전통에 모방하도록 길들이고, 모방은 당연히 우리를 우둔하게 만든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관습을 따르는 것은 관습에 순응함으로써 마음이 편하고 안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당시 배부르고 살만한 사람들의 관습을 무시했다. ‘관습을 깨부수는 결혼이 진짜 결혼이다’라고 생각했다. 

편집국장은 마지못해 휴가를 승인했다. 국장은 마지막에 ‘혼자 세상을 사는 게 아니라’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결혼식이 열리는 서울 어린이대공원의 5월 중순, 날은 화창했고 하늘은 푸르렀다. 보랏빛이 감도는 ‘붓꽃’, 하얀 눈꽃인 ‘이팝나무꽃’, 빨간 ‘장미꽃’, 샛노란 ‘큰금계국’, 하트모양의 ‘금낭화’가 공원 곳곳에 펼쳐져 있었다. 덩달아 나뭇잎 풀잎 꽃잎이 내는 침묵의 소리가 햇살을 통해 들려왔다.

예민해진 나는 자연 속으로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그 속에는 엄청난 아름다움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떤 언어도, 상징이나 관념이나 기억을 떠올릴 필요도 없었다.

아침부터 무표정으로 일관했던 나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나의 감각이 명료하게 깨어났다.

이 세상에서 홀로된 자의 결혼식, 이방인의 결혼식은 화려했다. 그 시발점은 시장에서 산 노란 실반지를 신부의 손에 끼워주는 것이었다. 청소비 명목으로 7만2000원을 어린이대공원 측에 지불한 것이 결혼식 비용 전부였다. 

지금도 내 머리에는 그 장면이 사진처럼 확연히 찍혀있다. 

결국에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자(?)의 결혼식, ‘나의 결혼식의 하루’는 여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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