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클레임]
피해자는 왜 가해자의 이름이 거론되는 것을 꺼릴까.
먼저 왜 진보당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가해자의 실명을 공개하지 말라고 하는지를 우린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어떤 분이 "피해자가 밝히지 말라고 한다고 우리까지 그 실명을 말 못할 까닭이 뭐냐"며 가해자의 이름을 말하고 있다.
그럼 왜 피해자가 '가해자'의 실명이 드러나는 반대하는지 알아보자.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과연 직장 내 성희롱이 뭔지를 알아야 한다. 설문에 따르면 직장인 절대다수가 성희롱 예방 교육을 받지만 정작 무엇이 성희롱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해서 대부분 직장인들은 성희롱은 언행만 조심하면 되고 회식이나 술자리의 조직 문화만 바꾸면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희롱은 애초부터 노동문제에서부터 기인하여 나온 개념이다. 한국에서 '성희롱'이라는 단어로 번역되는 'sexaul harassment'는 직장 내에서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다양한 종류의 성적 괴롭힘을 뜻하는 것으로, 1973년 메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메리 로Mary Rose의 보고서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되었다. 로는 1970년대 초 메사추세스 주의 여성 단체에서 논의되던 직장 내 여성들에 대한 괴롭힘을 주목하고 많은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괴롭힘과 협박을 당하면서 해고되거나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을 보면서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sexual harassment'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1975년 뉴욕시 인권위원회 증언에서 이를 상세히 기록했다. 이에 따라 미국에서는'sexual harassment'를 원치 않는 '성적 접근"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하고, 강간과 강제 추행을 포함하여 성적으로 문제를 발생시키는 모든 행위를 'sexual harassment'로 보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검색하면 나오고 성 희롱 예방 교육에서 듣는 성희롱 즉 직장 내에서 개인간에 벌어지는 성적 언행을 통해 가해와 피해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업무, 역할, 태도, 가치평가 등 노동구조 전반에 자리한 성별 불평등으로 인해 성적 괴롭힘이 발생할 때 이를 구조적으로 제기하기 위한 개념인 것이다.
그러니 직장 내 성희롱을 제기한(또는 정당 조직) 피해자를 단지 가해자(당내 유력 정치인)에 의한 피해 사실을 호소하는 피해자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노동자인 또는 이번 같은 경우에는 정당에 소속된 당원으로서 그 피해의 근간에 대해 그가 사회에 밝힌 노동구조(조직 구조)의 문제이다. 정확하게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피해자는 여러 차례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 보다 좀 더 나이가 더 많으신 분으로 좀 바꿔주기를 당 관계자에게 말했다고 한다. (진보당은 '생활비서'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번 진보당 성폭력의 피해자는 개인보다는 구조에 중점을 두고 법적 처벌 보다는 그 조직의 절차로 자신의 권리를 찾겠다는 것이 중점인 듯 보인다. 이 부분이 이 사건의 핵심이고 또 피해자의 선택은 당연히 존중 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런 해결 방식에 어떤 비판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로서 일상의 복귀가 가장 우선이라는 말에 그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는가? 허나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과 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은 별개이기 때문이다. 또 "피해자가 당원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가해자를 밝힐 수도 없는 피해자 말만 믿고 진보당을 마녀사냥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일부 진보당 지지자들도 정신 차려야 한다.
청년이나 여성들, 소수자들을 줄기차게 옹호하다고 말한 진보당에서 그 정당의 가치와 반대되는 사건을 일으켰다면 피해자와는 별개로 정치적으로도 더 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이다. 아니 이번 사태가 진보당에게 정치적 타격이 될 수 없을 때 문제가 더 심각한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단체나 정당들 가운데 을의 민주주의라는 이름에 걸맞는 조직의 형태, 실천을 구현하고 있는 조직이 존재하는가? 예컨대 민주노총이나 진보당의 조직과 내부 관행은 얼마나 민주적일까? 진보를 표방하는 단체들이나 정당이 오히려 청년이나 여성들 소수자를 외면하고, 스스로 학벌이나 연줄, 연령이나 권위주의에 근거한 행태와 문화를 답습하는 것은 아닌가?
진보당은 이런 물음과 성찰은 물론이고 공개적으로 조직의 어떤 잘못된 관행에서 이런 문제가 나왔는지는 밝혀야 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공당의 의무다. 그런데 계속 "현재의 사건이 아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를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고 말하는 것은 문제의 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
진보당과 함께 지금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실제로 이번 진보당 성폭력 사건 피해자의 일상 복귀를 위한 보호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에서 어디까지 공론화가 가능하냐 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인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실현하는 길위에는 기존의 사회, 권력 관계들, 그 복합체로서의 구조들에 조건 당하기도 할 것이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적대와 경쟁의 힘들이 뒤엉켜 낯선 또는 폭력적인 모습만이 펼쳐질 수도 있다. 허나 이것을 이겨낼 방법이 '우리' 혹은 '그들'만의 합의가 되어서는 결코 사회는 변할 수 없다.
민주주의 중심에는 기존의 지배적인 관계들로부터 배제되어 있는 혹은 그 배제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의 비지배적인 연대가 있다. 피해자가 원하고 바라는 사회는 진보당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시민(대중) 속에 있다.
분명하게 이 문제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문제가 질적인 사회의 성숙으로 이어질 사회적 합의의 과정은 고민하지 않은 채 그저, 정처적 올바름이라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서는 안된다. 또 정치를 미학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문제를 완화시키기보다 더 악화이킬 뿐이다.
시민들이 이런 문제에 대해 크든 작든 간에 스스로 민주주의의 실험장이 될 때, 피해자가 바라고 만들려는 사회의 좀 더 구체적이고 강력한 힘을 얻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