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인 집단행동과 대통령 특별사면을 보면서

뉴스클레임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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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왜곡된 말들을 제일 싫어한다. 막노동에 남의 집 똥통을 퍼주고 싼 내 아버지, 남의 집 식모를 한 내 어머니의 사회적 존재, 즉 사회 속에서 '그들은 어디 쯤 있었나' 그리고 그들의 딸인 나는 어디에 있었나! 이걸 물어 보고 싶다. 이 말은 우리가 '삶' 이라고 말하는 것에 물질적 삶이 있고, 정신적 삶이 있는데 이것이 저 위의  '직업에 귀천이 없다', 말처럼 따로 분리 되어서 돈은 못 벌어도 그 자체로 다 고귀하거나 가치가 있다, 이렇게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두가지는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데 그것을 구별하는 기준은 계층적 처지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에서 나름 열심히 활동을 한 사람이 야당(여당)으로 뺏지를 달았다. 그래서 그는 노동자 의식을 가지고 즉 자기 계급의식을 가지고 국회에서 열심히 할 것으로 기대를 한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실망한다. '아 저 사람 배신했다' 이런 얘기를 한다. 이 사람은 노동자에서 국회의원으로  사회적 존재로 변했다. 계급적 존재가 바뀐 것이다. 그랬을때 사회적 의식 즉 노동자계급 의식이 그대로 남아 있느냐! 일정 부분 남아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자기 사회적 존재에 맞게 사회적 의식이 물들어 간다는  것이다. 이건 법칙이다.

물론 반대 현상도 일어날 수 있다. 부자가 쫄딱 망해서 더 이상 어떤 부도 누릴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용직 노동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자신의 처지를 받아 들이기 힘들어도 한 3년만 굴러보면 노동자가 된다. 이것이 보편적인 방향이라는 것이다. 근데 우리는 자꾸 그것을 거슬리려는 생각을 말한다. 이것과 예외된 경우는 특수성이다. 우리는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일반화시켜 자꾸 뭔가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의 의지, 인간의 정신 이런 것들은 사회적 존재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결정된다. 물론 사회적 의식이 독립된 힘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러나 본질적으로 규정적인 요소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그 반대의 말들이 무슨 진실인냥 외친다. 예컨데,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 '노사 화합주의' '노사 공동 경영' 이런 것들은 다 어떤 본질을 왜곡한 표현들이다. 우리는 자신들 계급의 처지에서 실체를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 계급의 다수인 노동자 계급이 어떤 처지인지를 은폐시키는 저런 말들을 퍼트리는 것은 지배계급의 착취를 숨기고자 하는 것이다.

심지어 도덕이라는 것도 만들어진 자체가 역사적으로 어떠 어떠한 정세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맑스가 도덕이론이나 윤리학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덕이나 윤리가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특정 도덕 신념에 의해서 사회주의가 구축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현실이라는 사실에 의해서 사회주의라는 이론과 가치가 연역될 수 있는거지, 주관적인 신념으로써의 도덕에 의해 사회주의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를 한 것이다.

지금 사회 갈등을 조정할 때 국가나 사회가 어떤 방법을 취하고 있는 지를 한 번 돌아보라.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독히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에 의해 기업살인을 당하고 있어도 어느 정권도 그것이 기업살인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법으로 제정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번 의료 사태에서도 보듯이 상층 직업 집단이 집단 행동을 하면 정부의 정책도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내 아버지는 배우고도 남의 집 똥통을 퍼주고 살았다. 그것이 한 없이 부끄러워 술을 마셨다. 사람들도 똥통을 퍼주며 열심히 사시는 아버지를 조롱했다. '배우면 뭐 하노..저리 사람짓 못하면'  그런데 술을 마시고 사거리 평상에 너부러져 잠이 들면 그때는 ' 그래 사는게 얼마나 괴롭겠노...배운 사람이 안 풀리면 더 힘든기라.....' 하고 조롱에서 배운 사람의 힘겨움을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했다.

사람들의 삶에 경계가 있다.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으면 고귀한 정신적 일(노동)을 하고, 그런 사람은 사회적 특권이 보장 되어야 한다. 이것을 아니라고 말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지식인들의 머리에는 특권의식이 똬리를 트는 것이다. 대중들은 지식인들의 지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라는 특권의식. 그런데 촛불이 일어났다. 그러자 머리 좋은 지식인들은 제일 먼저 감을 잡았다. '대중의 자발성'을 찬양하며 글을 쓰기 바빠졌다. 대중의 자발성을 외치는 것이 대중이 아니라 지식인들 특히 교수들이었다.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 대중을 찬양하려면 본인이 대중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특권과 노동을 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특권을 내려 놓을 수 있을 때, 진정한 대중의 자발성을 찬양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고학력 지식인이 시간 강사를 하면서 편의점이나 택배 알바를 하면 모든 언론과 진보 지식인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불합리를 얘기하며 사회를 비판한다. 그러나 고졸 노동자들의 긴 노동시간에 대한 저임금, 최저생계도 보장 받을 수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은 어떠한지를 들여다 보자. 

아니 멀리 갈것도 없이 고김용균씨의 죽음 이후에도 김용균이 계속 나온다. 산업재해사망률은 21년째 세계 1위다. 한 해에 이천 명씩 죽는다. 거의 이건 노동과 자본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이 살인을 그냥 일상적인 일로 다 넘어간다. 그런데 만약 이런 재난상황에서 의사가 감염이나 과로로 단 한 명이라도 쓰러졌다고 생각해보라. 이 사회가 어떻게 반응할지. 또 조국이 입시비리로 2년 형을 받으니 그동안 수 많은 사람을 잡아 가두고 죽였던 국가보안법에는 입 한번 뻥긋 하지 않던 사람들이 사법체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들어 일어났다. 죽음과 법의 판결과 집행에도 계급이 생긴 것이다.

지식인들의 정신적 노동과 노동자 농민들의 육체적 노동의 값어치에 차별적인 의식을 버리지 못하면 우리들의 노동에 대한 착취를 넘어 생명의 착취를 우리 스스로 용인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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