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의 약속과 자유주의의 한계

촛불로 열린 문재인 정부는 장기 침체와 보수 정권의 후과 위에서 출범했다. 과제는 분명했다. 재벌을 위기의 언덕에서 구하고, 보수와의 차별성을 확보해 정권을 연장하며, 조직된 저항을 제도권으로 흡수하는 일. ‘소득주도성장’ ‘최저임금 1만 원’ ‘공공부문 비정규 대책’ ‘한반도 평화’가 그 언어였다. 그러나 약속의 수사와 정책의 실물은 어긋났다. 4·27과 9·19가 단계적 군축을 말할 때, 중기 국방계획은 사상 최대의 방위비를 예고했다. 평화를 말하며 칼날을 벼리는 모순, 그 균열은 곳곳에서 반복됐다.
경제 현장에선 규제완화의 바람이 먼저 불었다. 근로기준법 개정의 후퇴, 최저임금 산입범위 확대, 특구법·산업융합·ICT 규제 완화가 잇달았다. 노동의 교섭력은 ‘사회적 대화’의 미명 아래 희석됐고, 비정규·하청의 절벽은 더 가팔라졌다. 김용희의 고공 단식이 던진 질문이 체제에서 노동은 무엇으로 대접받는가에 권력은 설득과 단속으로 답했다. 남북·한미·조미 정상회담의 장면들은 내정의 균열을 덮는 화려한 커튼이 되었고, 커튼이 걷히자 체감의 현실이 남았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구조다. 비정규, 차별, 착취는 개별 자본가의 일탈이 아니라 축적 체제의 요구다. 자유주의 정부는 그 모순을 제거하지 못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제거할 의지와 설계가 없다. 보수와의 간극을 넓혀 정권을 연장하는 동안, 자본의 질서는 더 촘촘히 재편된다. 촛불의 도덕은 성명서에 남고, 생계의 수치는 영수증에 찍힌다. 그 사이, 실망과 분노는 정권 교체의 단순한 레일로 흘러들어 갔고, 결국 윤석열이라는 반동적 선택을 낳았다. 책임은 단지 ‘배신’이 아니라 ‘불일치’다. 말과 예산, 선언과 구조개혁의 불일치.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새 대리인의 선출이 아니다. 고통의 주체가 자기 언어와 조직을 가지는 일, 약속의 목록을 집권 세력에게 끈질기게 집행시키는 일, 그리고 제도 밖 연대를 축적해 대타협의 유혹을 상시적으로 견제하는 일이다. ‘사람 사는 사회’는 구호가 아니라 집요한 집행의 기술이다. 임금을, 안전을, 주거와 돌봄을 추상에서 예산과 제도로 끌어내려야 한다. 자유주의의 미소 뒤에서 반복된 유예와 변명에 더는 표를 외상으로 주지 말자. 촛불은 의식이 아니라 계약이다. 이 계약을 어긴 권력은 교체되고, 계약을 집행할 힘은 거리와 현장에서 자란다. 그것이 윤석열을 낳은 공백을 메우는 유일한 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