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클레임] 청계천은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 등 ‘내사산(內四山)’에서 흐르는 물이 서울 중심부를 관통, 동쪽에 있는 중랑천과 합류해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자연하천’이었다.
제방이 없는 ‘자연하천’이었기 때문에 큰비가 내리면 물이 넘쳐서 피해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한양 천도 당시 태종 임금이 제방을 쌓고 다리를 놓도록 했다. 이때부터 ‘개천(開川)’이라고 불렀다.
이 ‘개천’을 ‘청계천’이라고 고친 것은 제국주의 일본이었다. 행정구역을 자기들 멋대로 정하면서 ‘청계천’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이름을 우리는 지금도 쓰고 있다.
그런데, 청계천의 물은 애당초 깨끗하지 못했다. ‘개천’이었던 당시부터 혼탁했다. 구정물이었다.
세종대왕 때인 1444년 집현전 수찬 이선로(李善老)가 건의했다.
“…개천의 물에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도록 단속해서, 늘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오염을 방지해야 한다는 건의였다. 세종대왕은 ‘황희 정승’ 등을 불러서 상의했다.
“한성부낭청(漢城府郞廳), 수성금화도감낭청(修城禁火都監郞廳) 등이 나누어 맡도록 해서,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한성부의 당상(堂上)과 금화도감제조(禁火都監提調)가 항상 고찰하도록 하고, 사헌부는 무시(無時)로 검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집현전 교리 어효첨(魚孝瞻)은 반론을 제시했다.
“…도시는 사람들이 번성하게 사는 곳입니다. 그러다 보면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개천에 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문에 물은 맑을 수가 없습니다.”
의견을 종합한 결과, 더럽고 냄새나는 물건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개천의 물이 맑아지도록 할 수 없었다. 물길을 ‘종횡으로’ 더 뚫어줘서 더러운 것이 휩쓸러 내려가도록 해줄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백성을 동원해서 일을 시켜야 했다. ‘민생’을 고달프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세종대왕이 결정했다. 어효첨의 손을 들어줬다. 깨끗하고 맑은 물을 즐기기보다는 백성이 편하게 살도록 해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세종대왕은 이렇게 민생부터 챙기는 ‘어진 임금’이었다.
청계천이 복원 20주년을 맞았다는 소식에 돌이켜보는 ‘개천’ 이야기다.
물이 깨끗해진 덕분에 복원 전 4종뿐이던 물고기가 28종으로 늘었다고 했다. 자그마치 8배다. 2급수 이상인 물에서 고갇럼저뭄 쉬리도 발견되었다고 했다.
한국조류연구소가 청계천 하류 2㎞ 구간을 조사했더니, 새 38종, 845마리가 발견되었다고도 했다. 멸종 위기종인 원앙과 새매, 황조롱이 등도 있었다는 보도다.
이 맑은 청계천을 20년 동안 3억3000만 명이 찾았다고 했다. 하루 평균 4만7000명이다.
청계천뿐 아니라 서울을 흐르는 334km의 ‘지천’에도 깨끗한 물이 흐르게 될 전망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이를 ‘지천 르네상스’라고 했다. “지천 르네상스가 동네 하천 곳곳까지 이어져 서울시민의 하루를 더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 것”이라고 했다.
어쩌면 청계천 옆 광화문광장에 있는 세종대왕이 ‘지천 르네상스’가 민생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검토해보라고 할 것이다. 그 비용도 시민이 낸 세금일 것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