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률 작가
박상률 작가

[뉴스클레임] 오랜 전 김영삼 정부 시절, 영어 발음 잘해야 한다고 서울 특별시에서도 주로 강남 아이들이 혓바닥 수술을 한다고 했다. 특별시에서는 워낙 특별한 일이 자주 일어나 이제 별 짓을 다하는구나하면서, 혀를 끌끌 찬 적이 있다.

며칠 전 부산 광역시 의회에서 어떤 시의원이 연설 일부를 영어로 했단다. 부산시가 영어상용도시를 만든다고 해서 거기에 발맞춘답시고 그런 모양이다. 이제 영어 광풍이 특별시만 특별한 짓이 아니라 광역적으로 널리 퍼진 듯...

영어 잘 해서 나쁠 건 없다. 근데 때와 장소를 가려서 나불거려야지. 대한민국에 살면서 대한민국 사람을 독자 대상으로 하여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사람이 이제 한글 대신 영어로 소설을 써야 ‘글로벌’ 하다며 입에 게거품을 물기도 한다. 영어로 소설을 써야 노벨문학상을 비롯 각종 해외문학상도 받을 수 있단다.

시방 대한민국은 가히 영어공화국이라 할 만하다. 영어를 배우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가게 간판에서 한글 이름이 점차 사라지고, 굵직한 회사들 이름도 영어 표기로 많이 바뀌었다. 심지어는 나라에서 운영하던 공기업의 이름도 내놓고 영어로 바꾸고 표기도 영어 약자로 쓴다. 

요즘 여러 가게 등지에서 ‘키오스크’라는 말을 쓰던데, 처음엔 저게 뭐지 했다. 알고 보니, ‘무인 주문기’, ‘무인 계산기’, ‘무인 처리기’,‘무인 안내기’ 등 얼마든지 알아먹을 수 있는 우리말로 표기할 수 있는 말이더라. 

혹자는 ‘무인’이니 ‘주문기’니 하는 말도 어차피 우리 토착어가 아니지 않느냐고 시비를 건다. 하지만 그런 말은 이래저래 이미 우리말 화 된 한자어이다. 그러면 영어도 세월이 많이 지나면 어차피 우리말 화 될 텐데 뭘 그러느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 내 입만 아프니까...

모두들 영어, 영어 해싸니 이젠 나이 드신 분들도 자기 아내를 이를 때 곧잘 ‘와이프’라고 한다. 오랜만에 만난 어느 지인이 말끝마다 ‘우리 와이프가. 우리 와이프가’ 해서 듣다못해 ‘그 사이에 아내가 아메리카 사람 양녀로 바뀌었느냐?’고 물은 적도 있다. 어떻든 ‘아내’와 ‘마누라’와 ‘집사람’과 ‘안주인’은 다 집을 나가버리고 ‘와이프’가 그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연속극이며 일반 교양 프로그램에 나온 출연자들도 우리말로 할 수 있는 것을 꼭 혓바닥 굴려 영어로 ‘씨부렁’거린다. 그러다보니 텔레비전의 웬만한 프로그램 이름도 영어식으로 많이 바뀌었다. 

영어 홍수 속에 우리말 이름이 되레 낯설게 느껴질 정도이다. 왜들 이러나? 왜들 영어를 못해서 난리인가? 영어를 하기만 하면 저절로 밥 먹고 살 수 있나? 영어로 말하면 사람 값어치가 올라가기라도 하는 것인가? 
 
하긴 대통령도 영어를 부추기는 세상이었으니! 대통령쯤 되면 외국어를 잘하더라도 직접 나서서 설칠 필요가 없다. 의전상으로도 외국어 잘하는 전문가를 내세워야 한다. 더구나 국제회의 가면 일대일 통역은 물론 동시통역까지 된다. 그런데도 대통령조차도 외국어, 특히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박 씨 성을 가진 어떤 대통령은 자신이 갈고 닦은(?) 외국어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어 외국 나갈 따마다 외국어를 몇 마디라도 쓰며 대한민국 사정을 널리 알리고자 ‘솔선수범’의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대통령까지 이랬으니 일반인들이야 오죽하랴.

오래 전 언론/문화계 여러 사람이 일본에 가서 어떤 회의를 했단다. 다들 일제 강점기를 살아 일본말을 듣고 쓰는 데에 불편함이 없는데도 그 분들은 죄다 통역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을 말해서 감동했다는 사실을, 문학평론가 임헌영 선생이 들려준 적이 있다. 나도 속으로 ‘옳거니!’ 했다.
 
언어는 바로 문화 자체이다. 우리가 우리 말글을 팽개치고 영어를 앞세우면 우리의 의식이나 생활이 언젠가는 양인들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미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영어를 잘해서 미국 대학에 들어가고, 영어를 잘해서 외국 기업에 들어가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것 대신 ‘아메리카’ 것을 최고 가치로 여기게 된다. 이미 한국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어를 잘 하는 목적이 아메리카의 가치를 습득하자는 것인가? 그래서는 안 된다. 아메리카라고 언제나 세계인의 부러움을 사지는 못한다. 흥한 것은 반드시 쇠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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