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스클레임] KBS의 수신료 ‘강제징수’ 폐지와 관련, ‘이산가족 찾기’가 소환되고 있다. ‘이산가족 찾기’와 같은 ‘훌륭한 프로그램’을 방영해야 ‘공영방송’으로서의 기능을 하는 것인데, 현재의 KBS는 그런 기능에서 멀어졌다는 지적이다.
KBS의 ‘이산가족 찾기’는 대단했다. 방송을 지켜보던 많은 시청자들이 공감했다. 시청자들은 이산가족을 애타게 찾으며 눈물을 흘리는 출연자들을 보면서 함께 울기도 했다.
북한에 이산가족이 있는 노인들은 ‘생사 여부’라도 확인하고 싶다며 ‘채널’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장면을 시청한 노인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여의도’로 몰려가기도 했다. 방송 화면에는 보이지 않은 이산가족을 혹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뙤약볕을 맞으며 매일같이 이산가족을 찾던 노인들은 까맣게 타고 있었다. 그러고도 생사조차 파악할 수 없던 노인들은 속도 까맣게 타고 있었다. 그런 노인들의 자녀는 건강을 해치게 될 것 같아서 마음을 태우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검색’하면 이랬었다.
‘이산가족 찾기’는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무려 138일에 걸쳐서 453시간 45분 동안 생방송 특별프로그램을 진행되었다.
이날 밤 10시 15분부터 ‘누가 이 사람을 아시나요’라는 타이틀로 생방송했는데, 폭발적인 반응으로 첫날부터 당초 예정된 2시간에 2시간 30분을 더 연장 방송했다.
138일 동안 10만 952건의 신청이 접수되었고, 1만 180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할 수 있었다. 한국방송공사 사옥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이산가족을 찾는 벽보가 나붙었다.
당시 한국방송공사는 어용방송이란 오명을 들었지만,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통해 공영방송으로서의 본연의 역할을 부분적으로 감당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런데, KBS가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시작하던 초기에 대한민국의 ‘신문’은 어땠을까. 냉담했었다. ‘남의 방송’ 취급이었다.
여러 신문은 이 ‘중요한 사건’을 조그맣게 보도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 방송의 프로그램’이라는 식으로 KBS라고 밝히지도 않고 있었다.
그랬다가 뒤늦게 ‘대서특필’하게 된 것은 ‘외신 보도’ 때문이었다. 외국 언론이 주목하면서 크게 보도하자, 국내 신문도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랬던 신문이 새삼스럽게 이산가족 찾기를 ‘소환’하며 공영방송을 따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