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사진=정보철 편집위원

[뉴스클레임]

지난 9월 중 어느 날, 그날따라 일찍이 약속장소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수유역 인근 롯데리아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서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근래 들어 멍 때리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게을러졌다는 신호이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 사둔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은 배낭 깊은 곳에 꾸겨져 있었다. 며칠 동안 배낭에 파묻혀 있던 책은 헌책처럼 일부 페이지가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책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첫 장이 아니라, 책의 중간을 펼쳤다. 한두 장 읽다가 약속 시각에 맞춰 그곳을 떠날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산이었다. 금세 책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나와는 다른 필체로 써 내려가는 작가의 의식의 흐름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나의 문체와는 달리 작가의 문장에서는 도중에 설명 부족이 눈에 띄었다. 아니 과감히 설명을 생략하고 독자의 상상력으로 그 간격을 메우게 하는 필체가 돋보였다. 여백의 미학이 그대로 실현되는 문장들의 연속이었다.

시간은 금방 흘러 책을 덮고 그곳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손에 책을 쥔 채 롯데리아에서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눈을 뗄 수 없었다. 수유역 길거리에 서서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겼다. 길거리에서 읽고 있는 책의 장면은 ‘여름의 풍속’이었다. 김애란 작가가 2007년 즈음에 쓴 ‘여름의 풍속’;을 17년이 지난 2024년 여름에 내가 더듬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의 열기는 여전했다. 늦여름의 여름 잔해가 사정없이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열기는 수류탄 파편, 얼떨결에 끌려간 전쟁터에서 수류탄 파편에 부상이라도 입은 듯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지만, 책은 손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사실 이런 류의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무시하는 편이었다. 여성 특유인 감상 위주의 글이라고 가볍게 취급했었다. 그런 내가 여성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책을 펼친 채 늦여름 한복판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서성거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렇게 된 것에는 그 며칠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내 책 ‘한 끗 차이’ 편집을 맡았던 최정원 실장이 문체에 대해 비판을 했다. 요즘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의 문체가 설명적이라는 것이었다.

“선생님 글은 설명이 많아요. 일례로 ‘것이다’를 남발하고 있어요. 그건 바로 설명하는 문체입니다.”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쓸 때 가끔 힘이 부친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던 터였다. 설명에 할애하느라 에너지가 많이 소비되었으니까.

“기사를 쓰듯이 독자에게 자비롭게 대할 필요가 없어요. 일일이 설명하지 말고 그냥 문제를 던지고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은 어떨까요?”

‘설명’이란 단어가 뇌리에 꽂혔다. 뒤돌아보면 ‘설명하는 삶을 살아왔기에 설명하는 글을 쓰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것’은 둔감의 소치이다. 세월이 넉넉하게 흐른 지금에서도 고집스레 ‘설명하는 문체’를 지키고 있다는 것은 변화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건 지난날의 시간을 놓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둔감함으로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최 실장은 그 자리에서 2권의 책을 추천했다. 그중에 한 권이 수유역 길거리에 서서 책장을 펼치고 있던 책이다. ‘잊기 좋은 이름’이란 제목의 책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최 실장과 헤어진 후 곧바로 책을 구입한 것까지는 일사천리였는데, 그 책을 곧바로 배낭에 처박아 놓아버렸다. 교보문고에 갈 때만 해도 호기심으로 당장 밤을 새워서라도 책을 읽을 태세였지만, 막상 책을 손에 쥐고 나서는 도통 모르쇠로 일관했다. 

생각해보니 이뿐만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호기심에 사라지고, 모든 일에 심드렁하게 대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사는 것에 둔감한 것이다. ‘항상 민감하게 살자’고 다짐했던 젊은 날의 의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삶에서 권태만 남았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그것은 삶에 대한 어리석은 태도이다.

이날만 해도 그렇다. 길거리에 서서 책장을 넘길 만큼 나를 자극한 책을 한동안 배낭에 처박아 놓는 어리석음을 노출했다. 좁은 생각의 틀에 갇혀 사는 어리석음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여유를 가지면 뻔히 바라볼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 사소한 일에 묶여서 해결책을 놓치곤 했었다. 언제부터 삶에 여유가 없어진 것일까? 

항상 같은 것을 생각하고, 세월의 변화를 읽지 못했다. 변화하지 않는 삶은 이미 썩고 있고 이미 죽어가고 있다. 모든 것에 익숙해지고, 삶에 대한 민감성을 잃어버렸다. 

삶은 산들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호수에 비춘 달을 보러 가기도 하고, 개울가에서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는 여유를 가져야 할 것이다. 가을철 따사로운 햇살이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을 그윽이 지켜보는 것도 또한 미소지을 일이 아니던가.

삶은 빈틈이 있을 일이다. 그 빈틈은 설명이 필요 없는 여백의 공간이다. 그럴 때 삶은 확장되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삶과 글은 한가지이다.

그렇다면 글에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다. 행간을 읽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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