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클레임]
흔히 ‘고기는 씹어야 맛이고 말은 해야 맛이다’라고 한다. 맞는 말일 수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 다르므로 무조건 맞는 건 아니다.
일상의 언어, 법의 언어, 문학의 언어는 결이 사뭇 다르다. 12.3 내란 이후 많은 국민이 일상의 언어 대신 법의 언어를 ‘장착’해야 했다. 탄핵 인용이니 기각이니 소추니 기소니 내란중요임무종사자니 병합 심리니 하는, 일상에서 잘 안 쓰는 말들을 몇 달째 언론에서 보거나 듣고 입에 올리기도 해야 했다.
‘호모찌질이’ 계통의 한 종자는 계엄으로 엄청난 충격을 국민들에게 줘놓고도 아무 일도 없었다며(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지금 상황이 호수 위에 떠있는 달그림자를 쫓아가는 느낌이라고 강변하면서 ‘경고성 비상계엄’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호수 위의 달그림자? 한 국회의원은 달그림자도 계엄의 목격자였다라고 반박!)
문학의 언어는 일상의 언어를 비틀어서 쓰기도 하고 그대로 반영하기도 한다. 법의 언어도 문학의 언어가 되면 은유로 쓰이기도 하고, 직설적이고 섬뜩한 언어도 낯설게 하는 효과를 얻어 가끔은 신선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법의 언어와 문학의 언어는 같은 글자를 쓰더라도 ‘말맛’은 하늘과 땅 차이라 할 만하다.
‘경고성 비상계엄’은 애초에 법의 언어도 아니고 문학의 언어도 될 수 없다. ‘경고성 살인’이라는 말이 가능하지 않듯 경고성 비상계엄도 말이 되지 않는다. 계엄을 저질러 놓고 경고하려는 마음이었다고? 사람을 죽여 놓고 경고하려고 살인했다 할 수 있나?
백 번 양보해서 속내는 ‘경고’였다(그렇지도 않았겠지만...)하더라도 법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와 구체적 결과만을 가지고 판단한다. 형사 문제에 있어 고의니 우발적이니 과실이니 하며 양형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 범죄의 결과가 없어지는 건 아니다.
속내(내면)를 적는 건 그나마 문학의 언어다. 심리주의 작품에선 얼마든지 인물의 속내를 적을 수 있다. 살인을 하고픈 마음이든 불을 지르고 싶은 마음이든 심리주의 작품은 내면의 갈등을 언어로 쏟아낸다(심리묘사). 그러나 작품 속 인물의 마음을 흉내 내 현실에서 살인을 하거니 불을 지르면 그 순간 범죄자가 된다.
대통령 자리에 가기 전부터 ‘王’자를 쓴 손을 내보이던 종자나, ‘수거’라는 말로 체포 대상 인물 목록을 수첩에 적은 전직 무슨 사령관 출신 성추행범(안산보살로 신분 세탁!)을 보는 순간 이런 말이 떠올랐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