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언어로 생각을 한다. 물론 종교적(특히 불교)으로 보면 언어 이전도 있고, 언어가 끊어진 자리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지는 수행력이 높은 수도자의 영역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어가 있기에 그것에 기대어 생각이란 걸 한다.
두루 알다시피 언어는 문자언어(글)와 음성언어(말)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문자언어든 음성언어든 그걸 사용하는 사람의 생각을 담아낸다. 그래서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이 언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을 가다듬고 숙성시키는 일은 언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이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이리저리 옮기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며 없애기도 하면서 우리는 자신의 속내를 가장 잘 나타내는 글과 말을 구성한다. 그러한 글과 말이 생각을 더 자라게 한다.
훈민정음이 왜 만들어졌을까? 무엇보다도 생각과 말의 불일치 때문 아니었을까? 생각은 우리말로 하는데, 표기는 한자로 해야 하는 사정을 임금 세종이 잘 꿰뚫어 보았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걸 세종은 빨리 알아차렸다. 그래서 뭇 벼슬아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이 훈민정음을 만들고 반포하였으리라.
그 당시 벼슬아치들은 어려서 중국 글자인 천자문을 익힌 뒤 한자로 쓰인 문헌들을 1,20 년씩 달달 외워 과거를 통해 벼슬자리에 나아갔다. 그런데 한나절이면 익힐 수 있는 훈민정음이라니? 그들은 자신들이 고생해서 익힌 한자보다 더 좋은 글자는 없어야 했다. 뭇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못 해야 자신들의 기득권도 지킬 수 있다고 여겼다. 백성들은 생각 없는 무지렁이여야 하는데 글자를 익혀 생각이란 걸 하면서 똑똑해지면 그만큼 피곤해지리라는 걱정도 들었다. 그래서 많은 벼슬아치들이 훈민정음 창제와 반포를 반대했다.
우리말을 쓰는 언중(言衆)이 지구에서 1억 가까이 되어 언어 규모가 세계 11위에서 12위 수준이라는데, 양말을 쓰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사람들이 많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름도 상당수가 영어이고, 아파트 이름도 영어 남발에, 길가의 가게 이름도 알쏭달쏭한 양말 투성이다. 그뿐인가? ‘무인 주문기’ 하면 뒬 텐데 ‘키오스크’라니? 처음엔 이게 뭔고 했다. 어차피 ‘무인’이나 ‘주문기’도 한자말 아니냐, 영어 ‘키오스크’도 세월이 지나면 익숙해진다고 역성을 드는 이도 있다. 하지만 지금 쓰는 한자말은 이미 우리말처럼 되었으며 중국에서도 안 쓴다!
한류 영향으로 우리말을 배우려는 외국인이 많다는데 정작 우리는 남의 말을 쓰지 못해 안달이다. 이러한 사정을 담아 광주역에서 황당한 일을 겪은 걸 시로 갈무리해 놓았다가 얼마 전에 시로 발표하기도 했다.
태풍이 두 개 지나가고/뱃속이 편치 않아 시달리고/바깥일에 정신이 없었지만/광주에 일이 있어 광명역에서 열차 탔다/광주역에 내리자마자 화장실에 갔다//내 오른쪽 옆 칸에서 큰소리로 전화하는 사내/응, 나 □□야. 지금 막 광주역에 골인했어. 광명역 주차장에 차 파킹하려 했는데 주차장이 오바해서 역에서 먼 사설주차장에 파킹하고 겨우 기차 탔네. △△하곤 싸인이 안 맞아서 컨택 못했고, ○○하곤 약속이 캔슬 되어서…, 근데 ××는 와이프가 병원 미팅 잡혀서 못 왔어. 택시 타고 가서 오프닝 멘트 할게. 조금 뒤 조인하세//내 왼쪽 옆 칸의 사내/그 냥반 참, 정신없게 허네. 거그는 입으로 똥 싸도 암시랑토 안 허요? 좀 조용히 허쇼. 똥 좀 눕시다//그 옆 칸의 또 다른 사내/아따 지저분하네. 그 냥반 영어나부랭이 드럽게 씨부렁거리네//(사이)전화 사내 조용//나(속으로만)/흐흐흐, 요샌 양녀랑 사는 이가 많은가 봐. 아내나 마누라 말고 와이프 따라 병원 가는 사람도 있네…//역 밖에 나와 택시 탔더니 택시 운전석 뒤 문구, 무섭네/전화 절대 금지/바닥에 침 뱉기 절대 금지/흡연 절대 금지/애정행위 절대 금지/통역 필요하면 창문 쪽에 적힌 번호로 연락//난 하나도 해당 사항 없지만 택시 기사 흘끔흘끔 쳐다봤다/다행히도,/기사 뒤통수 쳐다보지 말라,는 말은 없다.
-졸시 ‘입으로 똥 싸는 사내’
